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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욕망 사이,<웨이킹 네드>

아일랜드의 시골. 그것도 노인네들만 남은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에 네드라는 노인이 상금이 120억원쯤 되는 복권에 당첨된다. 감격! 감격! 너무나 감격! 너무나 감격해서 네드는 그만 죽어버렸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대역 네드를 내세워 상금을 받아내려고 벌이는 크고 작은 소동을 그린 영화, <웨이킹 네드>. 영화는 유익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상금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일종의 사기극도 흉포하거나 비열하지 않다. 영화를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마을 사람들이 꼭 상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길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 애틋하기까지 한 상금 받아내기 소동에 정작 당첨자 네드는 없다. 그는 죽어버렸다. 영화는 너무 재미있게 진행되어 초반에 죽어버린 진짜 네드의 존재는 아무도 괘념치 않는다. 문제는 당첨금이지 당첨자가 아니다.

복권이란 그런 것이다. 당첨되는 순간 당첨자는 죽어줘야 되는 것이다. 실제로 뉴스에 보도되는 1등 당첨자는 범죄자도 아닌데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고 신상은 비밀에 부쳐진다.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살던 동네를 떠난다. 물론 팔자가 좋아져서 그런 것이라지만 어쨌든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관계들이 끊어진다. 심한 경우 친인척 사이의 관계도 끊는다더라. 불로소득 당첨금을 좀 얻어보려는 사람들이 물귀신같이 달라붙어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갈 수밖에 없다. 사라져야 한다. 돈을 다 내놓거나 사라져야 한다. 복권이란 어떻게든 사람을 잡는 것이다.

2003년 새해 대한민국 최고의 화제는 뭐니뭐니해도 신종 복권이다. 한때 최고 당첨금이 천문학적인 금액인 800억원을 넘어서 급기야 온 국민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던 바로 그 복권. 그렇다. 정말 범국가적 차원으로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몇만원어치부터 수백, 수천만원어치까지 구입한 사람이 있었다니 800억원이라는 당첨금에 눈이 멀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택복권’ 정도의 복권에는 소박한 희망이나 걸더니 800억에는 왜 너나없이 눈이 멀었을까? 신종 복권이 유례없는 붐을 일으킨 요인은 그 당첨금이 이월되어 점점 커지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주효했던 포인트는 ‘숫자 여섯개만 맞추면 인생역전’이라는 광고 카피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바로 이 문장, ‘인생 역전’. 우리 국민 모두가 가장 간절히 소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인생 역전’이었던 것이다. 그 복권을 사겠다고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서글픈 풍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역전’이란 패배자들이 꿈꾸는 마지막 희망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중 대부분은 패배자였구나. 일류 대학을 가지 못했고, 일류 기업에 입사하지 못했고, 그래서 흠모하던 사랑도 얻지 못했고 여러 번의 맞선 끝에 겨우 결혼해서는 연고도 없는 동네 아파트 단지에 어렵사리 입주해서 살고 있다. 자동차를 살 때도 스타일은 둘째고 연비나 따져야 하는 인생. 그래도 이 정도면 보통이다. 최악은 아니고 보통이다. 그럭저럭 살 만한 수준으로 봐줄 만하다. 누구도 ’넌 인생의 실패자야“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인생 역전 안 하시려우?”라는 한마디 꼬임에 모두들 기꺼이 줄을 섰다. 그야말로 한탕 대박이 아니면 불가능할 패자 부활을 꿈꾸며 줄을 서서 복권을 사고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기도로 번호를 찍는다. 여섯개만 맞추면 인생 역전! 인생 역전! 인생 역전! 그리하여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수많은 절망과 극소수의 행운이 교차된다. 꽝이 돼버린 수십, 수백만명의 크고 작은 절망들. 또 실패. 또 패배. 에이 제기랄, 더럽게 안 맞네…. 이런 작은 푸념과 분노와 허탈감이 모이고 모인 것이 1등한테 엄청난 크기로 응집되어 상금으로 전달된다. 만약 그런 돈이 전부 나에게 주어진다면 참 상상만 해도 섬뜩하다. 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www.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