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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아래의 생각, <지붕 위의 바이올린>
2003-03-20

어릴 때는 아무런 정보도 지식도 없이 무작정 영화를 봤다. 내 방식대로 이해하고 내 방식대로 받아들인 그 영화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소멸하지 않고 마치 항체처럼 내 안에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다. 이제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영화. 인상적인 장면조차 그뒤 본 수많은 영화 속 장면들과 뒤섞여 가물거리는 영화.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달아 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룬 가정의 분위기는 생생히 떠오른다. 나의 기억이 틀리지만 않는다면 거기야말로 건강한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이다.

가난하지만 삶의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가던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유목민 집단. 그 안의 한 가정. 전통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아버지. 개성적인 딸들. 아버지는 타종족의 남자와 도피한 셋째딸과 급진주의자에다 가난하기까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둘째딸이 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아내에게 묻는다. “Do you love me?” 아내는 그들이 오랜 세월을 같이 살며 슬픔과 기쁨을 나눈 것이 사랑없이 가능했겠냐고 그에게 반문한다. 하지만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의식에 의해 여과되지 않은 날것이었을 것이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 밖으로 나오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같은. 그는 아내가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를 열정 속으로 딸들의 젊은 남자들처럼 흠뻑 빠져들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주제음악을 듣는다. <선라이즈 선셋>만큼이나 내 정서를 흔들었던 주제음악 <트레디션>도 듣고 또 듣는다. 그러면 전통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변화보다는 안정을 선택하여 사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고 생각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엄청난 위험에 처한 사람의 심장박동 소리처럼 본능적이되 때묻지 않은 아버지인 그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며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그리고 믿어주고 싶어진다. 그의 삶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나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보며 영화 속 아버지를 현실 속 나의 아버지와 비교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의 내 모습이 나의 아버지를 이해하려던 어설픈 노력 중 하나였다는 생각도 든다. 옛날 우리 가족은 고향과 인접한 소도시에서 한동안 살았고, 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 집을 방문하던 손님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사장어른이었다. 검은 두루마기에 갓을 쓴 사장어른이 우리 집에 오면, 아버지는 안경을 쓴 딸들에게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안경을 벗고 있으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몇 시간 정도 안경을 벗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나는 늘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내 안경을 다른 사람의 코에 얹어놓고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나는 안경을 벗지 않았을 뿐더러 지나치게 아버지를 의식해 자신도 모르게 턱을 쳐들었고, 우리네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던 아버지는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작은 일에도 우리 가족들은 한동안 불화를 겪었는데, 가뜩이나 혼란한 시기에 자신들의 운명을 비바람 속으로 내모는 딸들을 지켜보던 영화 속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감상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보며 이성간의 사랑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등을 보이는 행위라고 단정해버렸다. 왜 모든 사람을 연인처럼 사랑하고 모든 사람과 가족처럼 지낼 수는 없는 것일까, 생각했다. 현실 속 나의 친구들도 영화 속 딸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면 오로지 그 사람에게만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보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등을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사랑의 몰입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연애나 결혼과 함께 사라졌던 친구들이 어느 날 불쑥 눈앞에 나타나곤 했다.

관련영화

조은/ 시인·시집 <사랑의 위력으로> <무덤을 맴도는 이유>, 에세이 <벼랑에서 살다>, 동화 <햇볕 따뜻한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