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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이야기 - 르네 젤위거 [4]
박은영 2003-03-28

감정이 옷을 벗다`시카고를 뒤흔든 미모으 재즈 킬러` 르네 젤위거

르네 젤위거는 <시카고>의 촬영이 한창이던 지지난해 겨울 토론토의 번화가에서 봉변을 당했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가를 즐기던 그녀는 허름한 차림으로 테이크아웃 커피를 홀짝이며 구찌 매장을 서성이다가, 그만 눈높은 점원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음료 반입 금지’의 룰 때문이려니 짐작하고 순순히 물러난 그녀를 뒤늦게 알아본 매장 책임자가 호텔로 사과 선물을 보내 수습에 나섰으나, 그 바람에 이 해프닝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르네 젤위거는 이런 일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녀의 산책을 방해하는 건 대개 그녀를 팝스타 주얼이나 비욕으로 착각하고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더러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시 우리, 같은 학교 다니지 않았나요?”

르네 젤위거는 무대 위의 화려한 조명보다는 옥외의 밝은 햇살이 더 잘 어울리는, 평범한 얼굴과 몸매를 가졌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녔지만, 전형적인 블론드 미인 스타일은 아니다. 서양인으로는 드물게 둥그런 얼굴, 발갛게 부푼 뺨, 작고 길게 째진 눈, 하트형 입술의 그녀는, 그리 예쁘진 않지만 ‘성격 좋은’ 이웃집 누이처럼 살갑다. 하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재밌고, 친근한 매력뿐이었다면 할리우드엔 명함도 내밀 수 없었을 것이다.

부드럽고 밍밍한 윤곽의 이 얼굴을 주목하게 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믿을게, 그리고 응원할게”라고 말하는 듯 따뜻한 포용의 진심을 담은 두눈 때문이었다(<제리 맥과이어>). 그리고 꿈과 현실이 다이내믹하게 교차하던 눈가와 입가의 풍부한 표정 때문이었다(<너스 베티> <브리짓 존스의 일기>). 그렇게 착하고 신실한 소녀의 이미지로 다가온 르네 젤위거가 어느 날 갑자기 정반대 방향으로 튀어올랐다. 마릴린 먼로를 닮은, 야심찬 스타 지망생이자 탕녀인 록시 하트(<시카고>)를 선택한 것이다. 르네 젤위거는 뭇 남성을 희롱하는 “뜨거운 여자” 록시 하트와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적어도 <시카고>를 보는 동안 르네 젤위거 버전의 록시 하트에 시비를 걸기 힘들다. 이제 우리가, 할리우드가, 그녀에게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믿을게, 그리고 응원할게.” 어쩌다 이렇게까지, 르네 젤위거라는 배우의 ‘밑도 끝도 없는’ 변신을 지지하게 된 걸까.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첫눈에 빠진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다. 매혹이 빠르고 강렬할 수록 시효는 짧아지게 마련이다. 스타와 사랑에 빠지는 대중의 심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할리우드의 웬만한 여배우들과는 첫눈에 사랑에 빠질 만하다. 그러나 그게 다다. 그 정도만 좋아하거나 아님 덜 좋아하게 되거나. 첫눈에 반한 배우를, 시간이 흘러 더 좋아하게 될 수는 없다.”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의 패럴리 형제도, <제리 맥과이어>의 카메론 크로도, 르네 젤위거가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유형의 여인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르네 젤위거가 여느 여배우들보다 덜 아름다워서, 그 때문에 저절로 이뤄진 건 아무것도 없다. 르네 젤위거가 어필하는 지점은 ‘척’하지 않는 솔직함과 자연스러움의 연기, 특히 감정의 파고를 오롯이 담아내는 이른바 “감정의 누드 연기”다. 르네 젤위거는 때로 우는 듯 웃고, 웃는 듯 운다. 페럴리 형제가 “레몬을 씹은 듯 시큼떨떨한 얼굴”이라고 표현한, 애매하고 난처한 표정은 이제 르네 젤위거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것은 르네 젤위거가 서 있는 지점이, 바비인형의 화사한 궁전이 아니라 희비극에 다름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내겐 눈부신 매력이 없고, 내 생활도 그렇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나부터도 누가 얼마나 예쁜지 관찰하고 감탄하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가지는 않는다는 거다. 난 감동 받고, 울고, 웃고, 배우길 원한다.”

<원 투루 씽>

<브리짓 존스의 일기>

약점을 드러내라

한때 <시카고>의 록시 하트로 물망에 올랐던 샤를리즈 테론의 캐스팅이 성사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너무 완벽해서”였다. “록시 하트를 연기할 배우는 살인을 저지를 만한 인물이라는 걸 관객이 믿게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관객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사람을 캐스팅하지 못하면, 쇼도 영화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실무 제작자 크레이그 제이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발적으로 애인을 살해하고, 은폐와 조작으로 스타덤에 올라, 쇼비즈니스에 뛰어드는, 순진하면서도 간교한 여인 록시 하트의 이중성은, 그것이 외모이든 이미지이든 완벽하고 야무진 배우에겐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욕망에 솔직하지만 그 욕망을 실현해가는 품새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약점투성이’의 인물, 록시 하트는 바로 르네 젤위거였다.

르네 젤위거의 ‘빈틈’은 그간 그녀가 쌓아올린 캐릭터 이미지의 핵심이다. 사랑과 이상만 믿고 직장을 박차고 나오는 싱글 맘(<제리 맥과이어>)이나, 좋아하는 연속극의 주인공과 못다한 사랑을 이루겠다고 길 떠나는 시골 새댁(<너스 베티>)이나, 일과 연애의 뒤엉킨 실타래 속에서 허우적대는 노처녀(<브리짓 존스의 일기>) 모두 ‘대책없는 여자들’이다. 그들을 하나로 꿰는 것은 “변덕스럽고 멜랑콜리한 카리스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지켜보는 것조차 불안하고 아슬아슬하지만, 그 때문에 진심으로 그들의 ‘건투’를 빌게 되는 것이다.

스크린 밖의 르네 젤위거의 삶도 완벽하진 않았다. 80년대 말에 처음 극장이 들어선 텍사스 시골 마을에서 자랐고, 고등학교 땐 연극 서클의 담당 교사에게 외면당했으며, 대학에선 연기를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짐 캐리와의 연애관계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르네 젤위거의 출신과 이력과 사생활은 ‘후광’이 돼주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보통 사람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 분신들이 그러했듯.

동시대 여성과 호흡한다

노력한다고 누구나 중요한 배우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르네 젤위거란 배우가, 그녀의 캐릭터가 특별한 것은, 동시대 여성의 경험, 욕망, 자의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캐릭터들을 선택하고 체현하는 건, 웬만한 통찰력이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과 결혼은 여성의 삶에서 여전히 중요한 전환점이지만, 르네 젤위거의 분신들에겐 더이상 ‘절대적인’ 목표가 아니다. 르네 젤위거의 분신들에겐 더 이상 ‘절대적인’ 목표가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가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무모하고 위험한 선택에 대해서도 언제나 당당하다. “지금 당신과 잘될 수 없다면, 다른 누구와도 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남자의 고백을, “그 정도의 확신에 평생을 걸 순 없다”며 자르고 돌아설 줄도 안다(<브리짓 존스의 일기>).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출세의 길을 거짓 보장한 남자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기고, “죽일 수만 있다면, 한번 더 죽이고 싶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시카고>).

매스컴이 만들어낸 환상과 가치를 숭배한 나머지 자기 자신과 연애 상대에 대한 이상과 현실 속에서 시행 착오를 거듭하는가 하면(<브리짓 존스의 일기>), 현대 여성의 피난처인 소프 오페라에서 위안을 구하기도 한다(<너스 베티>). 어머니 세대에 대한 애증을 드러낼 줄도 안다. 커리어에 대한 야심을 공룡처럼 키우고(<원 트루 씽>), 이성을 유혹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면서(<엠파이어 레코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항변’의 삶을 살기도 한다. 르네 젤위거의 분신들은 누군가에게 선택당하거나 배신당하는 것이 여성 (캐릭터)의 존재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역설해 보인다.

<제리 맥과이어>

<너스 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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