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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나의 그리스식 웨딩>을 보고 미국의 신경증에 이갈다

지겨운 백인우월주의

영화 보고 한참 만에 신나게 웃었다. 순전히 한 남자 때문인데, 그자의 인상착의는 이렇다. 얼굴은 중국식 호떡 같다. 모양은 쟁반처럼 둥글고 포동포동하게 부풀어 올라 있는데 피부는 달 표면처럼 푸석푸석하다. 눈은 거봉포도 알 같아서 일견 경이와 호기심으로 충만한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장난기로 가득하다. 여기에 반대머리와 올챙이배로 약간의 악센트를 준 원통형의 체형이 접합된다. 그리고 혀짤배기 허스키 목소리와 읍소로 시작해서 으름장으로 끝나는 독특한 어조가 음향효과로 믹싱된다. 그가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합성한 캐릭터라면 작고한 코미디언 이기동과 한때 슬라브 세계의 최고 권력자였던 흐루시초프를 참조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직업은 그리스 식당 ‘춤추는 조르바’의 사장, 특기는 윈덱스(유리 닦는 세제)로 피부병 고치기, 취미는 가출한 영어단어 제집 찾아주기이다.

이 남자가 살던 나라는 “민주주의와 철학과 점성술을 발명한 나라”이다. 지금 기술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박살내고 있는 앵글로색슨이 나뭇잎으로 뒤를 닦을 때 이데아를 논하던 나라이다. 하지만 미처 국제정치학과 측량술과 제국주의를 발명하지 못해 외침으로 얼룩진 현대사를 갖고 있다. 단돈 8달러를 들고 이 남자가 미국으로 건너온 이유도 자식들만은 발칸반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자유는 미국에서 그리스식으로 살기다. 그리스 식당을 하고 자식들을 그리스 학교에 보내고 그리스 청년을 사위로 맞아 순종 그리스 손자를 보는 게 그의 꿈이다. 그런데 딸은 나이 서른이 돼도 시집갈 생각을 못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보기에도 나이보다 늙어보일 만큼 외모를 꾸밀 줄 모르는 촌닭이다. 어느 날 그녀는 ‘춤추는 조르바’에 손님으로 온 이민족 청년에게 첫눈에 반해버린다. 물론 남자는 이 촌닭에게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얼마 뒤 남자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들여다본 여행사 사무실에 단정히 앉아 있는 한 여자에게 반한다. 이 여자는 다름 아닌 촌닭이다. 짧은 시간 동안 한 여자에 대한 남자의 인상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을까? 그 사이에 여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여자는 아버지의 그리스식 통치를 피해 대학에 들어가고, 거기서 영어단어의 그리스어 어원 대신 이진법의 기계어로 작동하는 컴퓨터를 배운다. 직장도 ‘춤추는 조르바’를 떠나 여행사로 자리를 옮긴다. 화장을 시작하고 헤어스타일을 뒤집어엎고 투박한 뿔테안경을 콘택트렌즈로 바꾼다. 말하자면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을 거친 뒤 발칸의 촌닭은 비로소 아메리카의 도시여성으로 거듭난다. 이 지점에서야 호의적 시선을 보내는 이민족 남자. 변호사 집안의 자손으로 법대를 다니다 전공을 바꾼 이 잘생긴 남자의 직업은 선생님이다. 누굴 가르치고 싶었던 걸까? 아직 계몽되지 않은 지상의 모든 조르바?(조르바는 온순한 육체와 합리적 이성을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평생을 자연산 인간으로 살았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은 두 남녀가 사랑하고 결혼하면서 양쪽 가족 사이에서 빚어지는 불협화음을 담아낸 로맨틱코미디다. 말하자면 결혼을 둘러싼 그리스와 미국의 충돌인데, 공교롭게도 모든 웃음의 원인 제공자는 그리스인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여자의 남동생이 남자에게 건네는 결혼 축하인사는 “누나에게 상처주면 신장을 도려내버릴 거야”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몹시 웃는다. 이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과거에 과격한 지중해 남자들이 여형제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코믹하게 과장되긴 했지만 그리스의 결혼 풍습은 미국이란 공간 속에서는 우스개다. 베르그송의 견해를 따르면 웃음은 ‘웃음의 원인 제공자에 대한 웃는 자의 따뜻한 징벌’이다. 이 말은 따뜻함으로 봉합된다 하더라도 모든 웃음은 비웃음의 계기에서 시작됨을 암시한다. 즉, 웃기는 자는 일단 징벌당한 다음 사면되고 수용된다. 그래서 웃는 자는 웃음을 통해 웃기는 놈에 대한 징벌의 흔적을 덮고 관대함을 현시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합리적 분업체제가 붕어빵처럼 찍어낸 신경증적 개인들이 혈연과 온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전근대인을 지능적으로 조롱한다. 유적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이다.

나는 할리우드가 ‘나의 이라크식 웨딩’이나 ‘나의 북한식 웨딩’을 제작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잘은 몰라도 <나의 그리스식 웨딩>과 마찬가지로 정사장면이 하나도 없을 거라는 점은 확신한다. 백인과 타인종의 정사장면은 할리우드에서는 금기에 가깝다. 그들은 이견은 참는 척해도 이물감은 견디지 못한다. 바그다드에 진격 중인 미군이 시가전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기껏 소총 한 자루를 사이에 두고 이민족과 몸을 맞대야 하기 때문일 거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할 때부터 그들은 이민족에게 갈 때는 강력한 살충제로 방역을 하고 들어가는 위생학적 습관이 있다. 이번 이라크전에서도 유난한 결벽을 떨고 있다. 타인의 위생을 염려하기 전에 자신의 신경증 증세부터 진단받아 보는 게 어떨까 싶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