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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TV로 자리 옮긴 <우비소년>

한 지붕 일곱 악동이들

애본리 마을을 떠나 진학한 앤은 친절한 두 할머니의 배려로 예쁜 집에 둥지를 틀었고, 자매들과 헤어진 조우는 개성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하숙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덕분에 ‘하숙집’에 대해 낭만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건만, 스무살 무렵 내가 살던 곳은 그런 환상을 완전히 깨고도 남는 곳이었다. 좁고 어두운 방, 물도 제대로 안 내려가는 화장실, 먹다만 반찬이 일주일 넘게 나오던 밥상…(그렇다고 하숙비가 싼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 집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할 만큼, 쓰디쓴 경험이었다.

무참히 짓밟힌 환상이 십여년 만에 다시 살아 움직인 것은 <우비소년>의 ‘우거지 맨션’을 보고 나서다. 골목 깊숙이 눈에 뜨일세라 붙어 있던 그 하숙집에 비하면, 전원 주택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우거지 맨션의 모습은 얼마나 위풍 당당한가. 집안의 귀엽고 예쁜 가구들은 또 어떤지. 하숙이라면 치를 떨었건만, 이런 집에서 하숙한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로이 비쥬얼이 제작한 플래시애니메이션 <우비소년>은 우거지 맨션에 입주한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다. 2000년부터 인터넷(www.woobiboy.com)에서 소개된 49부작 <우비소년>이 22부작 5분 TV시리즈로 새롭게 구성, 지난주부터 매일 오후 4시5분 SBS에서 방영되고 있다. TV방영에 적합하도록 사운드 녹음과 레벨 조정 작업을 다시 했고, 과격한 대사와 화면은 다소 수정했다고 한다. 웹에서 인기 있었던 2∼3분가량의 에피소드가 두세편씩 소개될 예정이다.

<우비소년>의 첫째 매력은 단연 개성 넘치는 캐릭터. 웬일인지 노란 우비만 입고 다니는 ‘우비소년’을 비롯해 뱃살을 자랑으로 삼는 ‘뱃살공쥬’, 파란 운동복으로 엽기 트렌드를 선도하는 ‘뻥도사’, 공부 오타쿠 ‘오타군’, 통굽 신고 20cm 높게 사는 화장발 ‘미자’, 데이비드 듀코브니와는 상관없는 ‘뭘더’, 엘비스만큼은 느끼하지 않은 ‘엘비수’ 등…. 모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족과 떨어져 우거지 맨션에 모여 사는 이들은 하나같이 막강한 개성을 뿜어낸다. 자세히 보면 등장인물의 모습은 갈수록 섬세하고 세련되게 변하지만, 이들의 개성은 1화부터 ‘만빵’이었다. 우비소년 일행이 장안을 휘어잡은 데에는 기발한 패러디와 연출도 한몫한다. 을 비롯해 <사우스 파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가을동화> 등 플래시 제작 당시 화제가 됐던 작품들을 정말이지 기발하게 패러디해냈다(지금은 <우비소년>을 패러디한 ‘우비 삼남매’가 등장했지만 말이다). 전후좌우로 가깝고 멀게 움직이는 카메라워크도 놓치면 아까운 부분. 대사가 아니라 영상으로 모든 걸 보여주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강력한 입심을 자랑한 <사우스 파크>가 다소 냉소적인 분위기였다면, <우비소년>은 같은 것을 보고 자란 동시대 한국인들이 함께 낄낄댈 수 있는 공통분모가 숨어 있는,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동네 악동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작품이다. 캐릭터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것은 물론, 올 가을 방영을 목표로 26부작 HD TV시리즈도 제작 중인 <우비소년>은 이제 원소스멀티유즈에 성공한 대표적인 브랜드가 됐다. 소규모 창작집단에서 출발한 제작사 로이 비쥬얼도 앞으로 인적으로, 시스템적으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비소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 모든 스탭이 우거지 맨션 같은 분위기의 스튜디오에서 옹기종기 즐겁게 작품을 만들던 그 분위기는 부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