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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시집 가는구나,어린 배나무
성석제(소설가) 2003-04-09

4년 전 늦겨울, 나는 친구와 그의 개를 따라 어정어정 어느 산에 들어가고 있었다. 눈이 채 녹지 않은 숲을 지나니 볕바른 구릉이 펼쳐지며 문득 배나무 과수원이 나타났다. 반쯤 허물어진 흙집에 비료며 농약, 포장상자처럼 과수농사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런 걸로 보아 그 과수원에는 봄부터 가을까지만 사람이 오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배나무들 모습이 기괴했다. 수십개의 강철 파이프를 반달 모양으로 휘어 양끝을 땅에 박고 그 파이프들에 줄지어 철삿줄을 연결한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배나무들은 그 아래에 4열종대로 심어져 있었다. 기괴하다고 한 건 한 나무에서 나온 나뭇가지 둘을 각각 반대편으로 한껏 끌어당겨 엇갈린 Y자로 양쪽 철사에 비끄러매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나무를 시집 보내던 일을 생각해냈다. 보통 정월 대보름날이면 과실나무를 가진 집에서는 나무의 두 가지 사이, Y자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에 돌을 끼워둔다. 이렇게 하면 그해에 과실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여기서 돌은 남성의 생식기, 가지는 여성의 생식기에 대응한다.

그러고보니 돌만 끼우지 않았다뿐이지 어린 배나무들을 단체로 철삿줄에 묶어 시집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배나무의 가지는 어린아이의 손가락 정도밖에 되지 않게 가늘었다. 친구 말로는 그래도 거기서 어른 젖가슴만한 배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육종기술이며 화학비료, 농약의 발달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과육 그 자체에 바르는 성장촉진제가 있는데 아이들 머리통만한, 괴물 같은 배도 그 약을 발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이 원하기만 한다면.

배는 원래 물이 많고 커서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 중에는 가장 무거운 축에 든다. 손가락만한 가지로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그 과수원처럼 나뭇가지를 파이프에 붙들어 매는 것이고 나중에 한 나무의 가지와 옆줄에 있는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 터널을 이루도록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가지가 꺾이거나 줄기의 Y자 부분이 찢어지는 일도 막을 수 있고 나무의 키를 낮추어 배를 쉽게 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 배나무는 사람으로 치면 아직 시집갈 생각도 하지 않을, 한 열살짜리 아이로 보였다. 원래 나는 워낙 배를 좋아한다. 그런데 철삿줄에 결박되어 떨고 있는 어린 배나무를 보고 있자니 내가 배를 좋아하는 게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나무가 어리느니 연약하느니 하면서 나무와 사람을 동일시하는 데서 나온 쓸데없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 선진 농법에 따라 효율적으로 잘 재배하고 있는 걸 가지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래적 나무 시집 타령이나 늘어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나무들 앞에서 안쓰러운, 미안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천지간에 난 이상 배나무도 살아야 하고 잘살아야 하고 농부도 살아야 하고 잘살아야 한다. 나 같은 사람도 물 많고 단 배 덕분에 이따금 입 안의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논리가 아무 문제없이 합치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늦겨울 찬바람 속에서 가지를 한껏 벌리고 서 있어야 하는 어린 배나무 앞에서 내가 느낀 건 배나무를 최대한 옭아매고 희생시키는 것을 바탕으로 내 입맛이 만족된다는 것이었다. 어디 배나무만 그런가. 사과나무, 복숭아나무는 그렇지 않으며 가축이며 이른바 고소득 작물 일반이 왜 안 그렇겠는가. 배나무 같은 사람은 또 왜 없을 것인가. 사회, 계급은 또 없는가. 초인적이며 크기를 알 수 없는 자본의 투입과 산출 사이에 있는 물관, 또는 인터페이스에 불과한 존재들, 배나무, 나무, 나, 그리고 우리.

그뒤 배나무에 꽃피는 철이 되어 옆나무와 어깨를 겯고 완전히 터널을 이룬 어른 배나무들을 보고는 마음이 좀 가벼워지기는 했다. 그래도 아직 크고 먹음직스러운 배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