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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촌놈도 한참 촌놈인 모양이다, 이 나이 먹도록 경주라는 곳을 가본 적이 없는 고로…. 그런데! 마침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로만 듣던 그곳에 갈 기회가 내게 왔다.

한가로이 봄바람을 맞으며, 봄향기 속에 여유로이 관광차 다녀올 여행이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지만 그것은 아니고 세인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촬영 중인 강제규필름의 <태극기 휘날리며> 출연건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우정출연인데 밤 늦게 호텔에 도착해 내일 촬영분 콘티를 받아든 순간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리며 쾌히 하겠노라 승낙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것도 그럴 것이 제대로 안 생긴 내 얼굴 면전에서 폭탄이 터지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분노에 찬 장동건이 날카롭고 둔탁한 짱돌을 들고 달려들어 얼굴을 수십번 강타해 죽이는 장면까지(내가 무슨 이승복도 아니고…) 스타일 망가지는 건 고사하고 그 수고나 위험성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후회 반 속았다는 배신감 반으로 스스로를 힐책하고 괴롭히다가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았고 제작부들의 채근 속에 바삐 촬영장으로 향했다.

바람 세찬 빈 야산에 세워진 진지와 축사를 개조해 만든 포로소용소, 수십대의 군용차량과 세기도 힘들 정도로 동원된 엑스트라 등…. 슈퍼 크레인 위에서 2층 높이의 상황진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홍경표 촬영감독의 모습에서 다시금 공포가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비운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늦춰보고자 강제규 감독에게 원망 섞인 하소연을 막 풀어내려 하는데 온 얼굴에 숯검정칠을 한 장동건이 촬영장소로 들어섰고 그때부터 고행의 나의 하루는 시작됐다. 장비가 이동되고 엑스트라, 트럭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촬영 시작하려면 시간 좀 있겠다 싶어 담배 하나 입에 무는데 그 징한 강 감독이 시작하자며 일어섰다. “아니, 형 벌써 시작해. 시간 있잖아. 담배 하나 피우려고….” 그러자 “시간이 돈이다. 리허설 이미 마쳤으니 너만 올라가면 돼”하며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아닌가?

저 많은 장비와 인원, 연기자들이 호흡을 맞추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련만 이후부터의 촬영은 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지금까지의 촬영관습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필요 이상의 스피드 내지는 오버라고 봤으나 이성훈 PD의 말을 빌리자면 고도로 계획하고 수정된 절약형 제작 시스템이란다. 130억원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드는 데 남의 돈을 허투로 쓸 수 없고 진행의 오류와 시행착오를 줄여 최대한 제작비의 누수를 막겠다는 강 감독의 취지 아래 제작부 자체가 워크숍까지 가졌다 하니 말 그대로 대단한 준비성이었다.

전쟁영화고 몹씬(군중신)이 많다보니 꽤 시끄럽고 소란스럽겠다 싶었는데 그 또한 나의 오버였다. 위험스러운 촬영이 진행되는 3일 동안 현장에서 강 감독이 소리 한번 크게 내는 것을 못 봤고 지금까지 조감독은 물론 연출부가 누군지 나는 모른다. 강 감독은 촬영감독 홍경표와 사귀는 듯 현장에서 조용조용 의논을 하고선 장동건과 나에게 다가와 어떤 상황인지만 말해주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도 뒷배경에 깔린 군용장비와 그 많은 인원들이 사고 한번 안 내고 오케이를 받아내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날씨가 심술을 피운 것을 감안하더래도 그날 분량 못 찍고 온 적이 없다하니 그것이 현장의 유동성을 감안한 철저한 준비성에 있노라고 기염을 토하는 이 PD의 잘난 척은 괜히 재는 으스댐만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런 거 같다! 제작비 상승을 어찌 인건비 상승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이렇듯 내부의 균열을 메우고, 철저한 준비를 하며, 인화를 이뤄 매진한다면 좋은 영화는, 누구나 침흘리는 대박은, 만들어지고 터지는 것이리라. 김해곤/ <파이란> <블루>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