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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그녀에게>를 보고 남성관을 바꾸다

눈물 많은 남자를 안아야지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를 보면서 약간 놀라운 감정의 경험을 했다. 거의 첫 장면부터 마르코를 보면서 영화 내내 그를 안아주고 싶다는 느낌이 너무나 맹렬하게 든 것이다. 여기서 안고 싶다는 건 ‘후끈 달아오는’ 욕망의 미지근한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두팔에 힘을 주어 상대방의 어깨를 감싸고 싶다는 말이다. 언제나 무색무취, 무념무상으로 영화를 보기 때문에 영화담당 선배로부터 “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년”이라는 말을 태연자약한 포즈로 듣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쎈’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더 놀라운 건 태어나서 어떤 남자에게도 마르코를 볼 때만큼 안아주고 싶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관계에 있어 철저히 유물론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내가 스크린의 허상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건, 음… 이 영화가 작가가 의도한 바에 있어 대단한 성공작임을 드러내는 표시가 아닐까(어머, 웬 잘난 척?). 인터뷰에서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가 관객과의 포옹이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중에 베니그노가 감옥에서 마르코를 안아줄 때는 베니그노에게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그랬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마르코는 내가 본 영화와 살아온 현실을 통틀어 가장 ‘잘’ 우는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쏟아내는 눈물의 양에서나 질에서나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눈물의 왕자, 인간 짤순이다. 그리고 내 보기에는 가장 아름답게 우는 사람이다. 과장도 제어도 없는 울음. 그의 눈물은 너무나 순연한 느낌이어서 받아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진심으로.

그는 대체로 눈가가 젖어 있지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쓸쓸했던 눈물은 야외무대에서 ‘쿠쿠루쿠쿠 팔로마’ 노래를 듣다가 빠져나와서는 흐느끼는 장면에서였다. 지상의 무대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비범한 아름다움의 순간”에 그는 운다. 지난주 <씨네21>의 자뻑인터뷰에 나왔듯이 그때 그의 눈물은 쾌락보다는 고통에 가까워 보인다. 가장 충만한 순간에 가장 절실해지는 빈자리. 존재의 비애감만으로 결정(結晶)된 어떤 물질.

반면 베니그노가 울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두 사람 사이의 의미심장한 차이로 느껴진다. 솔직히 베니그노는 별로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내가 언제 이렇게 우는 남자에게 약한 적 있었던가). 물론 베니그노의 ‘그녀에게 말걸기’가 언제나 대답없는 메아리라는 면에서 그는 외롭다. 알리샤는 말을 들을 수도 할 수도 없는 식물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처럼 언제나 말을 걸 자세가 돼 있는 사람은 별로 외롭지 않아 보인다. 베니그노는 혼자서지만 공연을 보러 가서는 무용가에 대해서, 옆자리의 울보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할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간다. 옆자리의 마르코는 그저 울 뿐이다.

베니그노는 마르코가 감옥에 와서 전하는 알리샤의 죽음(거짓이지만)을 듣고도 울지 않았다. 다만 죽음을 선택했을 뿐이다. 여자가 기적처럼 깨어났고 자신은 강간범 낙인 때문에 영영 다가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의 소식을 듣는 게 덜 절망적이지 않을까. 아마 사실을 들었다면 그는 울었을지 모른다. 반면 마르코는 이미 식물인간이 됐기 때문에 안 들어도 됐을 소식- 사고를 당하기 직전 옛 애인과 다시 합치기로 했었다는- 까지 듣는 팔자다. 그는 또 운다. 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물론 <그녀에게>가 누가누가 더 외로운가를 겨루는 영화는 아니기 때문에 나의 이런 비교는 무의미할 것이다. 다만 나에게는 마르코의 삶이 훨씬 더 불완전하고 더 비어 보였기 때문에 그에게 더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마르코를 통해 나의 남성관을 약간 수정하게 됐다. 비록 나 이제까지 내 앞에서 우는 그리 많지 않았던 남자를 보며 “쟤 왜 저러는데, 술맛 떨어지게(단체모임에서 남자의 눈물)”라거나 “너 지금 니 모습이 얼마나 웃기는지 모르지?(나 때문에 속 뒤집힌 애인의 눈물)”라거나 “어휴, 더러워, 콧물이나 좀 닦으면서 봐(슬픈 영화 보며 옆에서 우는 남자의 눈물)”라는 식으로 반응을 해왔지만 그간의 작태를 준열하게 반성하며 눈물 많은 남자를 좋아하기로 했다. 그가 마르코처럼 내 앞에서 울 때 꼭 끌어안아 주고 싶은 그런 남자 말이다. 이번에 한국에 오는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를 보러가기로 한 것도 실은 순전히 그런 남자를 찾기 위해서다(이런, 순연하지 못한…).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