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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의 보증수표, 청년문화의 기수
2001-05-09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17 최인호 (1945∼ )

“그래, 난 대중(大衆)작가다! 넌 소중(小衆)평론가냐?”

<내 마음의 풍차>였는지 <병태와 영자>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거린다. 어찌되었건 최인호가 쓴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의

신문광고란에 제목보다도 더욱 커다란 고딕활자로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던 도발적인 카피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던 까까머리

시절의 나에게 최인호의 이 냉소적인 포효는 화인(火印)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최인호는 평단과의 조화로운 공생관계에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작가다. 덕분에 그는 빼어난 문학작품들을 숱하게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충무로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를 단지 흥행대박을 보장하는 베스트셀러의 원작소설가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작소설과 그것을

각색한 시나리오는 전혀 별개의 장르다. 최인호는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충무로에서 활약한 최고의 시나리오작가다.

최인호는 고교 시절에 이미 최연소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과한 작가다. 그의 처녀 장편인 <별들의 고향>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문학사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다.

그는 소설을 판매하여 그 인세만으로도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해보인 작가다. 그런 맥락에서 최인호의 신문연재소설들을

놓고 이른바 대중문학 논쟁이라는 것이 불붙어 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최인호는 그러나 평론가들과 말싸움을 하는 대신

대중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든다. 이장호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은 1974년 개봉 당시 70만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인 엄청난

흥행작이다. 고교 동창이기도 한 이장호가 이 원작소설의 영화화권을 사고 최인호에게 시나리오를 쓰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악착같은 투쟁(!)을

벌여야 했는지는 본지에 연재되었던 그의 ‘한국영화회고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작 내게 영화라는 예술양식의 매력을 흠뻑 느끼게

해준 것은 이듬해 정초에 개봉되었던 <어제 내린 비>다. 이복형제를 둘러싼 비극적 삼각관계를 신선한 감각으로 그린 작품인데 그

애절한 주제가의 선율이 긴 여운을 남겼다.

<바보들의 행진>은 어떠한 기준을 놓고

따지든 언제나 ‘한국영화 베스트 10’에 꼽히는 당대의 걸작이다. 유신체제하에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는

한국의 대학생들을 비터스위트(bittersweet) 코믹터치로 묘사한 이 영화는 통기타와 생맥주 그리고 시위와 방황으로 특징지워지는 70년대

청년문화의 한 정점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병태라는 캐릭터는 이후 <병태와 영자> <최인호의 병태만세> 등에서 지속적으로

변주된다. 유일한 감독작품 <걷지말고 뛰어라>는 의외로 그의 작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영화인데, 도시를 방황하는 두 젊은이의

뒷모습에서 <미드나잇 카우보이>를 연상시킨다. 하재영과 더불어 <전원일기>의 일용이로 낯익은 박은수가 주연으로 등장하는데

흥행에서는 참패를 기록했다. 대마초사건으로 이장호를 잃고 급작스러운 요절로 하길종을 잃은 그가 80년대의 파트너로 만난 감독이 배창호다.

<적도의 꽃>에서 첫 해후를 한 이후 이들 콤비가 안성기와 더불어 이룩한 흥행기록은 거의 신화적이다.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 <고래사냥 2>로 이어지는 연타석 홈런기록은 최인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한때 충무로에서는

‘흥행의 보증수표’라 하여 최인호의 원작소설이 출간될 때마다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 보증수표의 발행처는 원작소설이 아니라

시나리오다. <최인호 시나리오전집>(전3권, 우석, 1992)을 보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가령 그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중편소설 <깊고 푸른 밤>과 시나리오 <깊고 푸른 밤>은 전혀 다르다. 완벽하게 짜여진 플롯, 생생한 캐릭터들의

드라마틱한 변화, 간결하면서도 비주얼한 지문, 구어체이면서도 시적인 함축을 품고 있는 대사 등은 그야말로 상업영화 시나리오의 한 전범을

이룩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90년대 이후로는 시나리오 작업에서 손을 털고 대하장편에 매달리고 있는데 최근작인 <상도>가

또다시 베스트셀러 차트에 올라 그가 영원한 현역작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74년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 ★

1975년

이장호의 <어제 내린 비> ⓥ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 ⓥ ★

1976년

김수용의 <내 마음의 풍차> ⓥ

최인호의 <걷지말고 뛰어라>

1979년

김수용의 <사랑의 조건>

하길종의 <병태와 영자> ⓥ

1980년

김수형의 <최인호의 병태만세>

이경태의 <불새>

1982년

변장호의 <최인호의 야색>

1983년

배창호의 <적도의 꽃> ⓥ

1984년

배창호의 <깊고 푸른 밤> ⓥ ★

배창호의 <고래사냥> ⓥ

1986년

배창호의 <황진이> ⓥ

곽지균의 <겨울나그네> ⓥ ★

1987년

배창호의 <안녕하세요 하나님> ⓥ

1991년

배창호의 <천국의 계단>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