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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 상영관으로 대피하라!
2001-05-09

정신건강에 해로운 <한니발>을 보고 아줌마가 내린 결론

최보은 | 아줌마 femolution@dexmedia.co.kr

아줌마가 토머스 해리스나 아사다 지로만큼 잘 나가는 소설가라면, 리들리 스콧보다는 송해성 감독한테 판권을 넘기겠다. 소설 <한니발>에서

가장 기발한 대목이 한니발 렉터와 클라리스 스털링이 부부가 되어 하인들이 우글거리는 궁궐 같은 집에서 매일같이 섹스하며 잘 먹고 잘산다더라는

에필로그인데, 아무리 영화라 해도 이런 식으로 진부하게 바꿔놓다니.

영화에서 한니발은 남편따라 식성을 바꾼 예쁜 신부를 얻는 대신 자기 손목을 자르고 다시 잠수함을 타는데, 아줌마가 한니발이라면 도망가기 전에

먼저 리들리 스콧을 뜯어먹었을 거다. (혹시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기내에 싸들고 간 도시락의 내용물이 진짜 리들리 스콧의 머리에서 나온 거

아냐?) 아니, 굳이 식인종 아줌마가 되지 않더라도 복수할 방법은 있네. 그럼 복수차원에서, 지금부터 <한니발>이 말도 안 되는

열두서너 가지 이유 중에서 한두 가지만 밝히겠다.

우선, 한니발은 사람 먹는 게 나쁘다는 사실 말고는 모르는 게 없고, 사람 맛있게 요리하는 기술을 비롯해 못하는 전문기술이 없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이런 식으로 보통 사람 야코 죽이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단테의 시를 줄줄 외워 이탈리아의 고전학자들을 뻑가게 만들거나, 개코도

아닌데 냄새만 맡고도 향수와 비누의 브랜드를 알아맞춘다거나, 뇌뚜껑을 열어 골을 꺼내 먹으면서 그 골의 소유주로 하여금 죽지 않고 ‘맛이 어떠냐’는

등의 골빈 소리를 계속 나불대게 만들 만큼 해부학에 조예가 깊다는 식이다. 아줌마는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의 전기를 읽을 때조차, 이렇게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음, 늙은이 처지에 힘 세기로 말하면 한창 때 아놀드 슈워제네거 저리 가라이며, 명이 질기기로 말하면 007과 맥가이버를 합쳐도 못 당할

정도이며,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이나 뜯어먹고 사는 수배자 주제에 흥행수익을 미리 땡겨서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돈을 물쓰듯 쓴다. 애재라. 그가

클라리스 스털링을 클리토리스 스털링으로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먹고사는 문제로 속 편할 날 없는 아줌마가 한니발이 사랑에

빠져서 대소변도 못 가리는 속편을 보느라고 시간을 까먹을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양들의 침묵>에서 인간을 생식하던 렉터가, 속편에서는 익혀 먹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조리술을 선보이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문명은 발전하게 마련이라는 긍정적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아니면 문명의 산물인 첨단지식과 지성을 고루 익히고 갖춘 한니발

렉터의 식인 습관이, 결국 흡혈귀적 자본주의 체제의 ‘식인성’을 빗댄 고도의 은유라고, 또 유한계급의 2세인 흉칙망측(내면까지)한 메이슨이

굶주린 돼지(민중)들의 밥으로 던져지는 건 곧 자본가의 말로를 예언한 거라고, 따라서 이 영화를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우겨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스털링이 (소설과는 달리) 렉터 같은 카리스마적 남성의 구애를 뿌리치고 직업정신을 사수한다는 점에서, 페니미스트영화라고

박수칠 수도 있다. 아닌게아니라 여성비하를 일삼는 부패한 고위관리가 결국 골을 파먹히고 만다는 대목은, 여성들의 점수를 따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엿보이는 설정이긴 하다. 그러니 지금 그렇게 떠들고 계신 분은, 당장 평론가로 데뷔할 수 있는 길을 알아보시기 바란다. 렉터의 귀족취미, 그리고

스털링을 압도하는 주인공으로서의 렉터의 비중 등을 통해 이 영화의 정체를 일찌감치 감잡은 아줌마는 “아무리 뺑끼써도 <한니발>은

개똥이다”라는 아줌마다운 결론을 내리고, 계속 아줌마로 남아 있을 예정이니까.

어쨌거나 소설은 영화보다 열수는 더 뜬다. 한 예로 렉터와 스털링은 나쁜 놈 머리뚜껑을 열고 뇌수를 다 꺼내먹은 뒤에, 그 빈 머릿속을 이용해

설거지를 간단히 해결한다. 남은 음식 찌꺼기를 몽땅 그 머릿속에 쓸어넣고 도로 뚜껑을 닫는 것이다. 그러니 한니발 따위에 골을 제공하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머릿속의 빈 공간을 할리우드의 쓰레기통으로 이용당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은, 얼른 <파이란> 상영관으로 대피하시기

바란다. 최민식의 연기는 한니발도 겁먹을 만하고, 어눌해서 가슴을 후비는 장백지의 한국어 내레이션은 렉터의 기계적인 장광설을 귀에서 씻어내는

데 즉효약일 뿐 아니라, 사람도 딱 세명밖에 안 죽는다.<한니발>에서는 사람의 생골이 익어가지만, <파이란>에서는 우리

배우들의 연기가 익어가고, <한니발>에서는 초현실적 영웅들이 배부른 범죄놀음에 골몰하지만, <파이란>에서는 우리 같은

삼류인생들이 우리처럼 놀고, <한니발>을 보면 머리뚜껑이 열리지만, <파이란>을 보면 눈물샘의 뚜껑이 열린다.

미리 해명하는데, 파이란한테서 촌지 같은 거 받은 일 없다. 평론가들의 들끓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는 <친구>나 <파이란>

같은 영화가 또 나온다면 또다시 박수를 보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아줌마도 눈치가 있고 귀가 있어서 깡패영화, 퇴행적 정서, 남자영화,

가부장적 질서 등등등 다 생각하고 또 듣고 있고 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평단이 ‘출연진이 고루 연기가 되는 한국영화’가 나오기

시작하고 ‘말이 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한국영화라서 봐주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가 재미있어서 보는 관객’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의 의미를 지나치게 깎아내리거나 모른 체하는 게 아닌가, 의심도 든다. 아줌마는 그 대목이 너무 신나서, 당분간 이데올로기나 메시지

따위는 잊어버리고 살 것 같은 예감이다. 연기나 내러티브 같은 기본을 강조해야, 조만간 연기도 되고 말도 돼서 전국 1천만이 보는 진보영화

페미니스트영화도 나올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