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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영 작가에게 보내는 긴급 호소문

참으로 잘나시었습니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고된 시집살이를 끝내고 시어머니와 시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사랑스런 며느리가 되신 것과 2세를 잉태하신 일, 그리고 그처럼 몸과 마음이 힘든 와중에도 노트북 자판을 놓지 않으시고 드라마를 집필하시어 일일드라마 작가로 활약하게 된 일 등 축하받으실 일이 두루 많으신 듯합니다. 더구나 은아리영 작가와 저는 시집살이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며느리로 상당히 비슷한 처지여서, 이처럼 안팎으로 좋은 일만 생기는 은아리영 작가의 모습이 참으로 부럽게 느껴진답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긴급 호소문을 쓰게 된 것은, 어느 날 제가 시부모님과 함께 <인어아가씨>를 시청하면서 겪은 마음고생 때문입니다. 주중에는 한번도 식사준비를 한 일이 없고, 주말에도 간신히 제 방 청소와 빨래나 할까말까한 불성실한 며느리인 저는, 그날 모처럼 일찍 귀가해 시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서 제깐에는 ‘효도’라고 생각했더랍니다. 일 때문에 이틀이나 집에 못 들어간 터라 죄송스러운 마음에, 야근의 피로가 온통 눈꺼풀 위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두눈을 부릅뜨고 TV를 보면서 고시랑고시랑 말동무를 해드리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어아가씨> 방송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말았습니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요. 평소에 “음식을 씹는 게 뇌(머리가 아니고 뇌, 맞죠?)에 좋다”는 지론을 가진 은아리영 작가가 새벽같이 일어나 생선찌개를 끓이고 굴비를 구워 온 가족의 아침을 챙기는 장면이 방송되는 겁니다. 저는 평소 ‘만약 아침밥을 먹는다면 내가 아침밥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침을 먹지 않으며, 남편에게도 “아침밥 먹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라고 엄포를 놓곤 합니다. 일어나서 출근하는 것도 힘든데 새벽밥을 지어야 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거든요.

빈속으로 출근하는 아들, 며느리에게 미숫가루라도 타먹고 가라고 말씀하시던 시어머님은 방송을 보시면서 “그래, 아침에는 밥을 먹어야 하는데…”라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게 나무라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해도, 어찌 제 앉은자리가 바늘방석이 아니었을까요.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는데, 이번엔 이게 웬일입니까. 은아리영 작가가 “점심으로 만두를 빚어먹자”며 “만두는 김치 껍질을 벗겨서 만들어야 맛있다”고, 미처 몰랐던 생활의 지혜까지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날 은아리영 작가는 온 집안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청소를 하고,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드라마 집필에 필요한 자료 검색을 하다가, 문득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아래층 부엌으로 내려와 김치 껍질을 벗기셨을 테죠. 하긴, 은아리영 작가의 동생분은 딸기를 흐르는 물에 하나씩 칫솔로 씻어 소금물로 헹군 뒤 식구들에게 내놓으시더군요.

평소 은아리영 작가는 살림의 중요성을 모른 채 가정부에게 살림을 맡긴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교육 훈련하는 데 무척 공을 들이셨죠. “남다른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가족 건강에 필수적이다.” “주부가 가족을 위해 노동하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은아리영 작가가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벌이는 캠페인은 백번천번 옳은 얘기이긴 합니다만, 마음은 있어도 시간이 없고 몸도 안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이야기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작가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직장일이라는 게 무작정 출퇴근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짓고 하루종일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보필하고 집안일을 꼼꼼히 챙긴 뒤에도 노트북 앞에 앉아 불후의 명작을 쓰실 정도로 능력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그리 많지가 않답니다. 어쩌다 조금 일찍 퇴근할라치면 ‘여자라서 집안일 먼저 챙긴다’는 흠잡힐까봐 눈치 보이고, 사람들과 좀 어울려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 싶어 저녁식사에 술 한잔 곁들이면서도 마음은 벌써 집으로 달려갑니다. 휴일이요? 모처럼 늦잠 실컷 자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일어난다 해도, 아침 먹고 청소하고 점심 먹고 시장 보고 저녁 먹으면 하루가 다 갑니다. 준비하는 시간만 2시간 남짓 걸리는 만두는커녕 김치볶음밥 만들어서 가족들에게 생색내는 게 고작이고요. 자신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란 사치스런 얘기일 따름이지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인어아가씨>를 보고, 대한민국 시어머니들이 은아리영과 자기 며느리를 비교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시부모님과 함께 <인어아가씨>를 보다가 행여 시부모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까 겁이 나서 쪼르르 방으로 숨어버린 저 같은 며느리들은 어찌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간이 콩알만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거냐고요? 시부모님을 모시는데다 젖먹이까지 딸린 직장 선배는, <인어아가씨>가 방송되는 시간에는 절대 거실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답니다. 저 한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한 여성이 완벽한 며느리, 사랑받는 아내, 좋은 어머니, 유능한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드라마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슈퍼우먼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그만 자랑하시고(이미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투의 캠페인성 대사를 당장 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평소 말씀하셨던 ‘드라마의 사회적 책임론’에도 거스르지 않는 일인 만큼, 거듭 부탁드립니다.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