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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취향’이 뭐 어때서!
2001-05-10

컴퓨터 게임...<소녀 마법사 파르페> 시리즈

친구 중 인형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 서른을 넘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바비 인형 사진집을 거금을 들여 모으고, 코믹월드나 아카 같은 데 가서 중학생들이 만든 종이인형을 사들이기도 한다. 그 친구 얘기로는 정작 중·고등학교 때는 인형에 질색했다고 한다. ‘순결’, ‘정숙’ 같은 교훈이 내걸린 학교에 가서, 여대를 가야 시집 잘 간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인형, 꽃, 레이스 같은 걸 좋아할 수는 없었다는 게 그 친구의 설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놓고 열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취향, ‘여성적인’ 가치가 열등하다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이날 선물로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남자아이에게는 로봇을 사주는 게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소꿉놀이의 동료는 늘 두살 어린 남동생이었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 ‘소녀취향’의 것들을 좋아할 권리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있는 것이고, 그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억눌려온 남자아이들이 커밍아웃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열변을 토했다.

나로 말하자면, 나도 남자지만 인형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가졌던 장난감들 중 인형이 꽤 많았고 지금도 예쁜 인형을 보면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지만 굳이 얘기하지도 않았다. 남자의 일생 중 가장 겉멋들린 시기인 고등학교 시절 그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했다면 어쩌면 가벼운 비웃음으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자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또 남자의 사회적 위신을 지키기 위해 우린 ‘소녀취향’을 의식적으로 거부해온 것이다. 하지만 ‘소녀취향’의 생명력은 강인하고 끈질기다. ‘바비’나 ‘제니’, ‘미미’는 30년 전에도 있었고, 300년 뒤에도 있을 것이다. ‘키티’나 ‘다래판다’ 같은 팬시상품은 여고생뿐 아니라 여대생이나 주부, 남고생들에게까지 슬그머니 입지를 넓혀가고 있고, 일본에는 자동차에까지 팬시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다.

이 코너의 주제인 게임으로 말하자면, ‘소녀취향’의 게임 역시 끈질게 면면을 이어왔다. 좀더 정교한 3D그래픽, 더 많은 폭력과 섹스, 빠르고 안정적인 네트워크라는 요즘 게임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을 지키지 못하는 게임이 아직도 나오고 있다. <소녀 마법사 파르페> <소녀 마법사 레네트> <꽃밭의 플로레>는 제목으로 보나 그림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전형적인 ‘소녀취향’ 게임들이다.

축복 받은 나라 플로로엘모스에 세명의 14살짜리 소녀들이 살고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빚더미에 올라앉은 덤벙이 파르페, 파르페를 라이벌로 여기는 자칭 천재 레네트, 티격태격하는 둘을 언제나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플로레. 꼬마 소녀들은 상점을 운영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냉혹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산으로 들로 나가 약초를 캐고 광물을 주워와 여러 마법약을 만들고, 그러다가 왕자나 음유시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커다란 눈동자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예쁜 옷만 입는 여주인공들, 여주인공보다 한수 위의 미모를 자랑하는 남주인공들. 파르페 시리즈는 전형적인 ‘소녀취향’ 게임이다. 그래도 난 이런 게임 역시 좋다. 남자가 어떻게 이런 게임을 하냐는 가벼운 비난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처럼 역시 여성 게이머는 수준이 낮단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낫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