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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느낌,<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1985년감독 송영수출연 정승호, 김진아, 김진, 김인문

내 인생의 영화라… 좀 거창하다.

내가 영화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영향을 준 영화들은 많다. 열거하기조차 힘든 많은 작품들이 떠오른다. 어떤 영화로 쓸까? 그래 이런 식의 글엔 너무 어려운 영화는 어울리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영화를 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영화는 어떨까? 어떤 거였지?

85년. 고2가 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적잖이 방황하게 되었는데, 유일한 탈출구는 학교 근처 삼류극장에서 동시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이제는 기억하기도 힘든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던 아주 작은 극장이었다. 하여간 당시 나와 내 친구 몇명은 일주일에 몇번씩 이 극장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리고 그해 개봉한 영화 중 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는 두세편에 불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여행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난 극장에서 영사기를 돌리더라도 꼭 영화를 할 거야”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한동안 나의 귀를 울렸고, 얼마 뒤 여름방학 무렵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 한편을 만난다.

아마 송영수 감독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듯하다. 내가 알기론 단 한편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만을 남긴 채 사라졌으니 말이다. 당시 국내 유일의 영화잡지였던 <스크린>에서는 그를 천재감독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가 실험성이 짙으며, 난해하고, 독창적 영상미가 그때까지의 다른 충무로 영화와는 차별화되어 있고…. 정말 극찬이었다. 그와 맞물려 “비가 오면 나는 잠을 자”로 시작되는 조금은 특이한 가사의 주제가가 뜨기 시작하고, 그해 여름 이 영화는 흥행에 꽤 성공했던 것 같다.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던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나와 몇몇 친구들은 가발까지 빌려 뒤집어쓰고 극장으로 향했지만, 조금 어려 보였던 내 외모(요즘과 달리 당시는 어려 보였다)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결국 우리는 이 영화가 학교 앞 삼류극장까지 내려오길 기다려야 했고, 그게 여름방학이 시작될 즈음으로 기억된다.

사실 너무 오래 전, 그리고 아직은 영화를 보는 눈이 성숙하기 전의 일이라 영화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다. 김진아가 누군가의 정부로 나오고, 정승호가 떠돌이 가수로 나와 둘이 사랑에 빠지고, 그러다 김진아의 정부를 죽이던가(?) 하는 내용이다. 근데 나를 잡아끈 것은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대사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고… 뭔가 좀 몽롱하고, 나른한 ‘느낌’이었다.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달랐던 ‘느낌’! 영화가 끝난 뒤 나는 갑자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충동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중 나에게 최초로 어떤 ‘느낌’을 준 영화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느낌’이란 것이 단순히 기록하기가 아닌 구도, 색상 등을 고려해 만든 ‘그림’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만일 그 ‘느낌’이 정말 ‘그림’ 때문이었다면, 영화에서 ‘그림’을 만들어내는 전통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시도된 몇 안 되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였으리라. 그리고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지금의 시각에선 좀 유치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요즘 영화에서도 ‘그림’을 보기가 힘드니, 나름대론 의미있는 시도였으리라.

다 쓰고보니 참 촌스럽다. 내 영화인생의 시작이 남들처럼 폼나게 타르코프스키나 베리만이 아닌, 지금 보면 영 유치해서 못 볼지도 모르는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라니…. 그러고보니 실제 영화 얘기는 거의 없다. 영화 얘기라곤 모두가 이제 와서 느껴지는 환상이다. 영화는 즐거운 상상이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다가 동네 비디오가게를 뒤져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나 다시 봐야겠다.박동현/실험영화아카이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