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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계하는 다큐는 지겨워! <한민족리포트>,<심야스페셜>
2003-06-25

<한민족 리포트> KBS1TV 월 자정

<심야스페셜> MBC 월·화·수 자정

<스카이라이프>에 다큐멘터리 칼럼을 쓰는 이창재씨를 만났다. 그는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에서 PD로 일하다 미국으로 떠났고, 요즘은 뉴욕의 한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 공부를 하고 있다. 마침 월드컵 1주년 기념 행사와 특집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한국이 많이 달라졌다”고, “TV 뉴스(에서 보도하는 각종 정치사회적 이슈들)도 재밌어지고, 사람들의 표정도 달라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딱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단다. 지상파에서 방송하는 다큐멘터리의 ‘수준’이다. 다큐 공부를 하는 사람이니 그 부분에만 유독 까다로운 평을 하는가 싶어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없어도 세렝게티 국립공원을 볼 수 있다”고 자랑했더니 피식 웃는다. “영양을 잡아먹는 사자를 촬영해서 HD 방송을 한다고 다큐 수준이 높아지나요.” 한국 드라마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다양한 소재와 개성으로 빛나는데, 다큐는 재미가 없어서 하품만 난다나? 다큐멘터리가 원래 하품이 좀 나는 장르가 아니었던가요, 라고 물으려다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지난주 월요일, 우연히 KBS1TV <한민족 리포트>와 MBC <심야스페셜>을 연달아 보다가 그의 차갑던 미소가 다시금 떠올랐다. 해외에서 살아가는 자랑스런 한국인들을 만나보는 <한민족 리포트>는, 그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큰 가구 공장을 하고 있는 한국인을 소개했다. 뻔한 성공 스토리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내용이 의외의 방향으로 흘렀다. 주인공의 성공 스토리를 용비어천가 식으로 읊어대는 대신, 주변 사람들의 이력과 일상을 통해 러시아 사회와 그 안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모습을 흥미롭게 조명했던 것이다.

전직 대학교수였던 경리 올가는 “사회주의 소련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내가,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무얼 가르쳐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만뒀다”고 털어놓는다. 알코올 중독인 아내를 보살피는 주인공의 운전사 샤샤와 주인공이 돌보는 거리의 아이들에게선, 하루 아침에 일자리와 잠자리를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는 세상으로 뒤바뀐 러시아에서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 없이 방치된 ‘보통 사람들’의 고통이 읽힌다. 조잡한 수예품을 들고 주인공의 사무실에 찾아온 북한 관리에게 주인공이 ‘자본주의 생존 법칙’을 조근조근 가르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갈 곳 몰라하는 러시아인들, 그보다 형편이 더 나쁜 고려인과 조선족, 북한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자본의 논리를 알고 있는 남한 출신의 부유한 사장은 ‘희망의 파랑새’였다. 일자리와 자선사업과 자본주의적 관점의 충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런데 이는 기쁜 일인가 아니면 서글픈 현실인가.

어떤 성급한 결론도 내리지 않고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계속된 이 ‘영상 리포트’는, 비슷한 시간 MBC에서 방송한 <심야스페셜>의 허술함 덕택에 더욱 빛을 발했다. <심야스페셜> 제작팀은 상상력으로 돈을 버는 전세계 기업들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애니메이션으로 대박을 터뜨린 미국의 한 스튜디오에서는 직원들이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꾸민 사무실에서 작업을 하고, 일본의 유명한 장난감 회사는 마징가Z와 같은 ‘옛 것’을 팔아 떼돈을 벌고 있단다. 취향대로 꾸민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누구나 돈 되는 상상력을 발휘할 리 없으며 추억의 장난감만으로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할 리 없는데, 제작진은 거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다음엔 <엽기적인 그녀>가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는 희소식을 전한 뒤 ‘한국적 상상력에 기반한 콘텐츠도 가능성이 있다’며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끔찍한 장면들을 보여줬다. 한국적 상상력이라는 표현도 애매하지만, <엽기적인 그녀>를 세번이나 보았다는 일본 관객의 인터뷰가 한국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경쟁력을 보장한다는 건 너무 억지스럽지 않은가? 비행기삯만 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 이 다큐멘터리가,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상상력이 돈이 되는 세상이니, 여러분도 상상을 많이 하시라’는 뜬금없는 결론만은 알 수 있었다.

“섣불리 대중을 가르치려 드는 다큐멘터리는 재미가 없다”고, 이창재씨는 말했었다. 그는 진실을 감추는 한국사회가 다큐를 훈계조로 만들었다고, 대중을 계몽하는 교과서 역할을 자처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세상이 바뀌었으니 다큐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해외 촬영으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해서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정보가 초고속으로 전달되는 세상에 제작기간이 한달 이상 걸리는 다큐로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기는 힘들 것이다. 대중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다큐가 여러 편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계몽됐다. 여건이 나빠진 건 이해하지만, 제작진은 좀더 고민하고, 무엇보다 다큐멘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하품이 나지 않는 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