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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의 이름으로,피어스 브로스넌
사진 이혜정김현정 2003-07-02

피어스 브로스넌은 흠집없이 미끈하게 다듬은, 박물관보다 대도시 중산층 거실에 어울리는 조각상 같은 남자다. 그는 초콜릿을 좋아하는 철없는 탐정 레밍턴 스틸이나 여자 앞에선 어떤 위급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마는 제임스 본드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최고의 007이었던 숀 코너리가 “타고난 제임스 본드”라고 결론지은, 짙은 머리카락이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남자.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깊고 선명한 푸른색인 그의 눈동자가 그늘 때문에 갈색으로 보이는 것처럼,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그 위에 내려앉아 있다.

브로스넌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도 전에 버림받았고, 가난 때문에 거리에서 불을 뿜는 쇼를 했고, 결혼기념일 다음날 14년 동안 곁에 머물렀던 아내를 잃었다. 웬만하면 한 사람의 인생에서 모두 겪기 어려운 고난을 차례차례 거친 뒤, 그는 “내가 특별히 힘들게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험난한 고비를 몇번 돌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낙천적인, 얄미울 정도로 티내지 않고 상처를 집어삼키는 에너지. 따뜻하고 유머있는 영화 <에블린>이 특별한 이유 하나가 더 있다면, 바로 그 에너지의 원천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을 빼앗기고도 굵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에블린>의 데스몬드 도일은 절망을 모르는 아버지다. 아이들이 있으므로, 아버지는 살아가야만 한다.

“누구도 나를 데스몬드로 캐스팅해줄 것 같지 않아서” <에블린>을 직접 제작한 브로스넌은 그 자신처럼 아버지인 “데스몬드의 용기와 단순함, 진실”에 매혹됐다. 데스몬드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달아난 뒤 아일랜드 가족법과 싸워 양육권을 얻어낸 실제 인물. 브로스넌은 “아일랜드처럼 엄격한 가톨릭 사회에서, 결손가정의 아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열한살 때 영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지만, 아일랜드 사투리가 강하게 남아 있는 남자아이는 영국 소년들의 텃세에 시달리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보호본능을 갈고 닦으며” 스스로 살길을 헤쳐갔다. 그런 그가 아직도 아일랜드에 강한 향수를 느낀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갈 수 없다면, 나무에서 떨어진 기분일 것”이라고 말하는 브로스넌은 제작사 아이리시 드림 타임즈를 만들어 아일랜드에서 영화를 만든다. 그가 기억하는 건 가난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품어주었던 자연과 혼자 남겨진 소년도 거뜬히 건사하던 대가족인 탓이다. 여비만 간신히 챙겨 일자리를 찾으러 간 그에게 미국은 TV시리즈 <레밍턴 스틸>과 007 시리즈를 선물한 기회의 땅이지만, 그가 돌아갈 곳은 여전히 아일랜드다.

브로스넌은 운이 좋은 배우는 아니었다. 연극학교 시절 그는 발음이 분명하고 카리스마 있는, 촉망받는 학생이었지만, 제임스 본드가 되기 전까진 <라이브 와이어> 같은 B급 액션영화나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조연 자리가 고작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데이비드 린치나 마틴 스코시즈는 한번도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올해 50살이 된 그는 007 시리즈에 최소한 한번 더 출연할 생각이지만, 덕분에 얻은 명성과 돈과 자동차보단 권력을 사랑한다. 기다릴 필요없이 하고 싶은 영화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스타가 됐기 때문이다. 브로스넌은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테일러 오브 파나마>에 출연해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를 패러디하는 용기를 가졌다. 그 용기와 자의식은 생각없어 보이는 외모에 묻혀서는 안 되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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