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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싱글즈>를 보며 공감하면서도 약간의 소외감을 느끼다

그녀들 너무 당당한 걸!

철없던 어린 시절,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다섯살 때 사무실의 내 옆자리에는 말로만 듣던 공포의 아홉수, 인생막장이라고 여겨지던 스물아홉살의 여자선배가 앉아 있었다. 그 선배는 좀 터프하고 웃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만날 그 선배랑 시시덕거리고 놀면서도 속으로는 자주 ‘어휴, 저러니까 시집을 못 가지’, ‘어머 저 팔뚝 좀 봐. 아주 인생을 포기했구먼’ 하면서 씹었었다. 그리고 그 선배가 스물아홉의 마지막 자락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했을 때 마치 내 딸을 시집보낸 양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무살 무렵에는 그때쯤 결혼도 하고, 커리어도 탄탄대로일 것이라 기대했던 바로 그 스물아홉살 때 나는 여전히 일에서도 빌빌거리며 후줄그레한 연애전선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친구들에게는 승전보처럼 연일 청첩장이 날아왔고 내 수첩에는 일수놀이하는 아줌마의 장부처럼 0일 김00, 011-***-%%%%%, 00일 박00 016-$$$-&&&& 같은 소개팅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서른살이 되면 평생의 진로를 정해 대학원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한참 됐지만 선택해야 할 전공조차 오리무중인 웃기는 시추에이션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 서른두살(만 나이로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삼십대다). 상황은 스물아홉 그때와 바뀐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나 이제 그윽한 관조의 시선으로 그 시절, 속타게 조급하고 불안했던 아홉수를 돌이켜본다. 적어도 나 같은 사람에게 삶이란 언제나 에버랜드의 독수리요새처럼 엄청 흔들리고, 후름라이드를 타고 내려올 때 찍은 사진처럼 절대 폼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인생의 평온을 얻었다. 제기랄.

그렇지만 관조의 시선으로 ‘어휴 저 귀여운 것들’ 하면서 <싱글즈>를 보지는 않았다. 연애전선 암울, 커리어전선 우중충이라는 면에서 내 신세나 그녀들의 신세나 그닥 다르지 않은 상황이므로. 언젠가 썼던 적도 있는 것처럼 가족으로부터 사실상 버림받는 30대에 믿을 건 친구밖에 없다는 나의 지론에 부합하는 동미와 나난의 ‘우정’은 내가 느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주도 왕자도 나오지 않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남 이야기를 보는 듯한 약간의 소외감을 느꼈다. 그래그래 맞아맞아 박수를 치면서도 왠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패셔너블한 옷을 입은 듯한 느낌. 공주들이 나와서 설치는 영화라면 ‘놀고 있네’라고 오히려 무시할 수 있겠지만 나랑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나보다 당당하고 자신있게 살아갈 때 더 심하게 드는 주눅과 시샘 같은 것일 게다.

아, 정말이지 나는 그녀들이 부럽다. 자신을 무시하는 상사나 동료를 보기좋게 깔아뭉개고 당장 사표를 내던지며 “나는 적어도 거래 따위는 하지 않아”라고 외치면서 자유롭게 사랑하는 동미처럼 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일하다가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취재나가서 별 꼴같지 않은 인간을 만나도 친구나 동료들을 붙잡고 징징대는 게 끝이다. 내가 벌어서 내가 잘살면 되지, 마음만 맞다면 백수면 어떠하고, 동생 일곱을 먹어살려야 하는 남자면 어떠하리라는 자유의지도 전혀 생겨나지 않는다. 독신모? 만약 남자친구와의 하룻밤 사고로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 남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내 인생 책임지라며 쌍팔년도 스타일로 돌변해 떼를 쓸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내가 아니라 친구가 그런 결심을 하더라도 “내가 아빠가 되줄게”라고 선언하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선물을 사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친구 손을 잡고 발랄깜찍하게 거리를 방방 뛰어다닐 수 있을까. 아니, 내 친구가 아니라 동미라도 나는 그녀가 나중에 사업한다며 애 들춰업고 짐보따리 들고 다닐 모습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다.

나, 서른줄을 넘기며 나름대로 인간 성숙했다고 본다. 앞에도 표명한 바와 같이 허무맹랑한 판타지 같은 건 이제 졸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싱글즈>는 아직도 멀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만큼 올라온 것도 숨이 막히는데 더 발랄해지라고, 더 쿨해지라고 나를 독려한다. 그리하여 급기야 독신모도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고? 여기까지 나를 몰아붙인다면 차라리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고 싶다. 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