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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17호 (1943~1945)
이유란 2003-07-19

영화사신문 제17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43∼1945

격렬했던 워너브러더스 앞 시위현장, 자동차가 넘어져 있다.

할리우드 노사대립 진정국면MPPDA 적극 중재 힘입어 유혈 파업 종료

드디어 8개월 동안 지속됐던 할리우드 노조의 파업이 끝났다. 1945년 10월 말, 노사는 미국영화제작배급협회(MPPDA)의 중재하에 1421번 세트장 노동자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파업에 참가했던 7천명의 스튜디오노조협의회(Conference of Studio Unions, 이하 CSU) 노동자들은 60일의 조정기간을 거쳐 현업에 복귀할 것을 골자로 하는 협상안에 서명했다. 이로써 유혈사태로까지 번졌던 노사의 극한대립은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갈등의 핵심은 스튜디오 경영진과 유착한 노조인 국제무대기술노동자연맹(International Alliance of TheariticalStage Employees, 이하 IATSE)과 좌파 성향의 신생노조 CSU간의 관할권 다툼. 1944년 10월 MGM이 CSU 소속의 세트 데커레이터 등을 공식 계약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파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는데, MGM은 이들에 대한 관할권이 IATSE에 있다며 CSU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CSU 소속 노동자들은 대거 MGM을 그만두었다. CSU 지도자인 허브 소렐은 대화를 통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1945년 3월 1421번 세트장의 데커레이터를 이끌고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점점 커져갔다.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까지 가세해 파업 참가 노동자는 7천명에 이르렀다. 전승기념일인 8월14일을 기점으로 파업의 기세는 더욱 고조됐는데, 스튜디오들이 파업 노동자를 대신할 요량으로 전장에서 돌아온 노동자들을 고용한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장 과격한 시위는 직장폐쇄 조치를 취했던 워너브러더스사 앞에서 벌어졌다. 이때 파업 진압대와 격렬한 대치를 벌이던 노동자 수십명이 다쳤다. 해머, 각목으로 무장한 파업파괴자들과 폭력배들, 총과 최루탄을 앞세운 경찰들이 진압에 나서면서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 즈음 허브 소렐을 겨냥한 총격암살 사건도 일어났다.

이렇듯 상황이 극한으로 치닫자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물론 의회까지 나서 사태 해결을 요구했다. 이에 윌 헤이즈 후임으로 MPPDA 회장에 선출된 에릭 존스턴은 노사 대표들을 불러 마라톤협상을 벌인 끝에 위와 같은 협상안을 도출했다.

영국영화 봄날이 온다

미국과 맺은 ‘금전적 쿼터제’ 투자 효과 커

전쟁에도 불구하고 영국영화산업은 번창일로를 걷고 있다. 단적인 예로 1939년 1900만명이던 주간 관객 수가 1945년 3천만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영화산업이 번영한 데에는 영국 정부의 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곧 영국 정부가 기존의 상영일수 제한 쿼터제에서 ‘금전적인 쿼터제’로 정책 방향을 튼 것이 주효하게 작용한 것이다.

영국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영국에서 거둬들인 수익금의 미국 송금에 한도를 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1939년 할리우드와 협상을 벌여 영국에서 벌어들인 미국영화 수익금 가운데 최대 1750만달러까지만 본국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한 ‘앵글로-아메리칸 영화 협정’을 체결했다. 동시에 영국 정부는 영국에 수출되는 미국영화 편수는 현행을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 영국영화의 제작편수 감소로 인한 공백을 미국영화로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0년에 갱신된 제2차 협정은 이를 더욱 완화했다.

이 협정으로 미국 영화사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본국으로 송금하고 남은 수익을 영국영화 제작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 할리우드는 영국에서 거둬들인 9천만달러의 흥행수익 중 4분의 3을 미국으로 송금하고 1250만달러를 영국 현지에 투자했다. 또한 이 협정으로 미국 영화사들이 영국영화의 해외배급 판권을 구입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할리우드에 창작의 자유를 허하라’

검열의 가시밭을 뚫고 1943년 2월 하워드 휴스 감독의 <무법자>가 ‘드디어’ 개봉됐다. 영화가 완성된 지 2년 만이다. 1941년 <무법자>는 제작법규협회(Production Code Admistration, 이하 PCA)의 검열에 걸려 상영이 좌초됐다. PCA는 여주인공인 제인 러셀의 가슴이 지나치게 강조됐다며, 이 장면들을 재촬영하지 않으면 개봉에 필요한 인증서를 내줄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하워드 휴스는 PCA에 굴하지 않고 영화를 재촬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PCA와 MPPDA의 전횡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에서 창작의 자유에 대한 ‘상징’처럼 사용된 이미지가 바로 이 스틸사진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영화보다 먼저, 영화보다 더 유명해졌다.

주목! 이 사람 - 제임스 왕 호위 촬영감독

주제에 걸맞는 촬영 스타일을 실험하다

‘로우-키의 호위’(Low-Key Howe)를 아십니까? 1940년대 이후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로 몰려들었지만, 그래도 동양인은 드물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국인 제임스 왕 호위(James Wong Howe)는 그렉 톨랜드에 버금갈 만한 촬영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다. 부단한 실험정신, 완고한 장인정신으로 그는 끊임없이 혁신적인 화면을 선보여왔으며, 별명이 암시하듯 탐정영화처럼 ‘어두운’ 영화에서 그의 재능은 더욱 빛을 발한다. 최근 그는 프리츠 랑과 함께 반나치영화 <사형집행인도 죽는다>를 완성했다.

1899년 중국 관둥지방에서 태어난 호위는 5살 때 미국으로 건너왔다. 한때 권투선수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세실 드밀의 제작팀에 들어가면서 할리우드에 입문했다. 당대 스타인 마리 밀즈 민터의 스틸 사진을 찍게 된 것은 그에게 중요한 전기가 됐다. 그의 사진이 맘에 들었던 이 여배우는 호위가 자신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의 초점이 됐던 것은 당연하다.

그는 영화의 분위기에 걸맞은 화면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다. 1924년 <피터 팬>을 촬영할 땐 판타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로우-키 조명을 사용했는데, 이 독특한 기술 덕에 그는 ‘로우-키의 호위’란 별명을 얻었다. 1933년 <권력과 영광>에서는 거물의 일대기를 유사 뉴스릴처럼 찍었다. 하지만 그의 실험이 언제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찍을 때는 테크니컬러사와 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다. 테크니컬러의 화려한 톤을 무시하고 가난한 시골 배경에 맞게 소박한 컬러를 사용한 것이 테크니컬러사 카메라맨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그는 이후 12년간 테크니컬러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

이렇듯 그는 사실성에 충실한 화면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스튜디오 세트 촬영보다 현지 촬영을 선호한다. 세트 촬영이 더 쉽지만, 그건 ‘가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밤장면은 밤에 찍어야 한다고 우겼다. 무엇보다 그는 “촬영은 주제에 걸맞아야 한다”고 믿는다. “의미가 있다면, 장면이 요구한다면 카메라가 움직일 수 있지만 움직임 자체를 위해 카메라가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스타일이 없는 카메라맨’, 아마도 그것이 호위가 꿈꾸는 최고의 경지일 것이다.

인터뷰 / <천국의 아이들> 감독 마르셀 카르네“배우는 천국 위에 있는 관객의 아이들이지”

1945년,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Children of Paradise)이 파리 마델레인, 콜리세 두 극장에서 장기상영 중이다. 영화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이 주인공 밥티스트 데부로의 매력적인 팬터마임을 즐긴 것처럼 파리지엔들은 이 영화를 보며 전후의 피폐한 영혼을 달래고 있다. 총상영시간이 179분에 이를 만큼 길어 1, 2부로 나뉘어 상영되고 있는 <천국의 아이들>는 팬터마임 배우 데부로와 여배우 가랑스의 운명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연극과 삶을 넘나든다. 1943년 나치 점령지인 니스에서 촬영을 시작한 이 영화는 나치의 감시 때문에 아찔한 순간들을 겪기도 했다. 카르네 감독은 자기 손으로 레지스탕스 지도자를 나치에 넘겨준 일을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천국의 아이들> 이야기.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나. 하루는 축제장면을 찍고 있었는데, 조감독이 와서는 “두명의 남자가 찾아와 엑스트라 중 한 사람을 급히 불러달라고 하는데 어떡할까요?” 하고 묻더라. 그 엑스트라의 아내가 몹시 아파 임종을 앞두고 꼭 남편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 그 낯선 남자들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인으로 보이던?” 했더니 조감독이 “니스 사투리를 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 엑스트라를 불러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들은 게슈타포였다. 그 엑스트라는 레지스탕스 지도자였고. 그 일을 생각하면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다른 레지스탕스들은. 스탭 중에 많았던 것 같다. 프로덕션디자이너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도망쳤다. 게슈타포는 언제나 우리를 가까이에서 감시했다.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에 게슈타포 장교를 애인으로 둔 여주인공 아를레티는 스탭들에게 경멸받았다.

어디서 영화 아이디어를 얻었나. 어느 날 장 루이 바로로부터 유명한 팬터마임 배우인 데부로가 자기 애인을 모욕한 술주정뱅이를 우발적으로 살해, 기소됐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재미있었던 건 이 마임 배우가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온 파리시민들이 그의 재판장으로 몰려갔다는 사실이었다.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19세기 극장을 재현하기 위해 관련 자료들을 뒤졌는데, 그때 극장 객석 2층 발코니를 ‘천국’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장난감 가게가 생각났다. 그래서 제목을 ‘천국의 아이들’이라고 지었다. 아이들이 살아서 천국에 가는 길은 배우가 되는 방법밖에 없다. 또한 배우들은 거기 천국 위에 있는 관객의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가 정말 길다. 제작자의 압력이 없었나. 상영시간이 기니까 2부로 나눠서 개봉하자고 제안한 건 제작자였다. 그래야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으니까. 배급을 맡은 고몽과 상의한 끝에 쉬는 시간을 두고 1, 2부로 나눠 상영하고 입장료도 두배로 받기로 했다. 모험이었다. 2주만 이렇게 상영하고 입장수입이 줄면 그들 맘대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단 신 들

할리우드 보수주의자 영화동맹

할리우드 내 좌우대립이 심각해지고 있다. 1944년 6월 말, 17개 노조가 할리우드 길드·유니온 위원회를 결성했다. 설립목적은 ‘미국의 이상을 보호하기 위한 영화동맹’(The Motion Picture Alliance for the Preservation of American Ideals, 이하 영화동맹)의 “반노동주의, 반노조주의, 인종주의에 대한 대항”에 있다. 개리 쿠퍼, 월트 디즈니, 킹 비더 등 할리우드 보수주의자들이 결집해 만든 영화동맹은 “스크린에서, 영화 노동자들 사이에서, 미국식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서 이를 위해 “공산주의, 파시즘, 나아가 할리우드에 낯선 ‘이즘’들을 물리칠 것”을 창립목적으로 내세웠다.

봉건주의 No, <호랑이 꼬리…> 상영금지

1945년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호랑이 꼬리를 밟는 남자들>의 상영이 금지됐다. 봉건시대의 고전으로 유명한 노(能) 드라마를 토대로 한 이 영화는 봉건주의 영화라는 이유로 민간정보교육국(CIE)으로부터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호랑이 꼬리…>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시대극의 제작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종전 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총사령부 산하 민간정보교육국이 정한 13개 항의 제작 금지 규정 리스트를 지키면서 시대극을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교육국은 국가주의나 애국주의, 봉건적 충성심을 예찬하는 것은 물론, 복수에 관한 것, 자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잔인 무도한 폭력 등을 금지 리스트에 올렸다.

네오리얼리즘 <무방비 도시> 공개

1945년 이탈리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가 공개됐다. 로셀리니가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스탭과 나치 점령기에 촬영을 시작한 <무방비 도시>는 종전 뒤 개봉됐는데, 흥미로운 건 이 엄연한 극영화를 관객이 다큐멘터리로 착각했다는 사실이다. 곧 관객은 실제 벌어졌던 사건의 기록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로셀리니가 점령군의 잔악함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퍽이나 놀라워했다고.

프랑스 ‘전쟁 폭풍’ 영화제작 올스톱

1944년 7월 프랑스 영화제작이 전면 중단됐다. 연합군의 폭력으로 5개 스튜디오가 파괴되고 322개 극장이 파괴된데다 극심한 물자부족까지 겹치면서 프랑스 안에서 영화를 제작하기가 불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