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문예영화의 막차를 탄 사나이
2001-05-16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18 여수중 (1928∼90)

1960년대의 한국영화를 논할 때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 이른바 문예영화라는 개념이다. 막연히 “예술성 높은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정도로 이해되고 있지만 정작 그 개념의

본질적 규정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덕분에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김지헌의 <만추>나 이상현의 <> 등이 문예영화의

범주로 분류되자 그 개념을 놓고 일대 공방전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도대체 문예영화라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랐을까? 간단하다.

이른바 문예영화라는 것을 만들면 정부로부터 외화수입쿼터를 할당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이 5.16쿠데타 직후 과거 일제시대의

영화법을 그대로 베껴 만든 졸속 영화법 때문에 빚어진 웃지 못할 촌극이다. 그러나 이 제도가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다. 흥행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도 된다는 것은 작가나 감독에게 얼마나 황홀한 작업조건인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문예영화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틈새시장을 비집고 세상에 나왔다.

문예영화의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이다.

이 기간 동안 숱한 문학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흥행성과는 무관하게 작품성 또는 예술성만을 추구했던 까닭에 상당한 완성도를 갖춘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호한 개념 탓에 시상기준에 대한 시시비비가 끝없이 계속되자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이

개념을 스스로 폐기처분한다. 그 결과 이른바 문예영화붐의 절정은 1969년이 된다. 여수중은 바로 그해 마흔이 넘은 나이로 두편의 문예영화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에 입성식을 치른 늦깎이 작가다. 황순원 원작의 <독짓는 늙은이>와 유치진 원작의 <나도 인간이 되련다>는

모두 당시 평단의 따뜻한 상찬을 받은 가작들이다.여수중은 일본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나 오사카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도쿄법정대학의 동양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직후 귀국한 그가 자리를 잡은 도시는 부산. <부산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 이후 실제비평과 시나리오 연구를 병행하다가 결국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좌우익이 격렬하게

충돌하던 해방정국을 배경으로 집필한 작품이 <모반>이고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신분제도의 질곡을 고발한 작품이 <꽃상여>인데,

모두 신성일이 주연이며 각각 남정임과 윤정희라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공연했다. 후자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허장강은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두용 감독과의 작업에서는 주로 토속적인 정취가 짙은 연극작품을 각색했는데, 오태석 원작의 <초분>과

허규 원작의 <물도리동>이 이에 해당한다. 김수형의 <갯마을>은 1965년에 만들어진 김수용의 <갯마을>을

리메이크한 것인데, 오리지널보다 다소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

여수중이 가장 길고 깊은 파트너십을 맺었던 사람은

사회파 감독으로 알려진 이원세다. 그와의 첫작품인 <인간단지>는 몰이해와 착취에 시달리던 나병환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양심과 사회정의를

부르짖는다. 재수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이 사회로 진입하면서 겪는 성인식과도 같은 통과의례를 다룬 작품이 <광화문통 아이>이고,

외국여행중 맺은 불륜의 사랑과 그 여파를 다룬 작품이 <삼일낮 삼일밤>이다. <삼일낮 삼일밤>은 외화 <7일간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는데, 가수 나훈아가 주연을 맡았고 미국 로케로 촬영되었다. <그 여름의 마지막 날>은

각본상을 수상했지만 다소 뜨악해질 수밖에 없는 반공영화다. 학생운동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그 묘사가 너무도 황당하여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몹시 분개했다. 아마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때문에 몹시도 곤욕을 치렀을뿐더러 참혹한 가위질을 당해야

했던 이원세의 괴로운 자기증명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혜영과 조용원이 등장했던 <여왕벌>은 뜻밖의 가작이다. 미군들을 상대하는 이태원의

여인들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인데 범상한 에로물이겠지 하고 봤다가 그 은근한 반미(反美)적 메시지에 적지 않게 감동했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9년 최하원의 <독짓는 늙은이> ⓥ ★

1969년 유현목의 <나도 인간이 되련다> ⓥ

1970년 박찬의 <모반>

1974년 김기덕의 <꽃상여>

1975년 이원세의 <인간단지>

1976년 이원세의 <광화문통 아이>

1977년 이두용의 <초분> ★

1978년 김수형의 <갯마을>

1979년 이두용의 <물도리동>

1981년 김기영의 <반금련>

1983년 이원세의 <삼일낮 삼일밤> ⓥ

1984년 이원세의 <그 여름의 마지막 날>

1985년 이원세의 <여왕벌> ★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