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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회고록 신상옥 7

“혼자 도취해가지고 찍은 것이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서 첫 작품 <악야>를 만들다

<피아골> 1955년, 제작사 백호프로덕션, 제작자 김병기, 감독 이강천, 각본 김종환, 촬영 강영화, 음악 정회갑, 조명 곽건, 편집 이강천, 출연 김진규, 노경희, 이예춘, 허장강.

“나는 폭격당한 사무실에 가서 책상 위에 신문지를 깔고 자면서 극영화예술협회해야 되갔다, 폐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고려영화협회의 미술 스탭으로 최인규의 영화를 접한 신상옥 감독은 ‘잘 들리느냐, 잘 보이느냐’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한 세대로서 해방기 영화를 높이 산다. 그리고 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된 곳에서 혼자 영화예술운동을 꿈꾸었던 자신을 다음 세대로 소개한다.

고려영화협회에 입사해서 <독립전야> 했고, <죄없는 죄인> 했고, 그 담 한 게 <인민투표>(<국민투표>)라는 게 있다. 투표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화영화. 그게 우리나라에서 처음 동시녹음이다. 그전에 <자유만세>니 뭐니 한 것들은 전부 후시녹음이지. 미국 사람들이 일본을 점령해가지고 전리품으로 미첼이라는 카메라를 한국에 갖다줬다. 물론 완전히 준 것은 아니고 미 공보원이 가지고 있는 걸 우리가 얻어다 쓴 것인데, 처음으로 미첼 카메라로 동시녹음한 작품이다. <죄없는 죄인>은 무슨 목사인가, 신사참배 안 한다는 목사. 마지막에 감옥에 들어가 죽은 사람, 그 사람 일대기다.

내가 미술 맡았다는 것은 그러니까 세트지. 소도구고 뭐고 다 미술이다. 포스터까지 맡았으니까. 그때는 분업이 잘 안 될 땐데 분화한답시고 연출부도 카메라 들고 다 카메라 들고 운반하고 그러는데 나는 미술한다 그래서 거기 보이질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신상옥이 안 나가면 자기들도 일 안 하갔다고 스톱을 해가지고 결국 내가 굉장히 애먹은 일이 있다. 왜 그런고 하니 난 미술인데 내가 왜 기계를 드느냐 해가지고.

그런데 그때 내가 느낀 것이 영화라는 게 활동사진이 아니고 역시, 화가는 항상 에스프릿을 생각하잖아? 그런 식으로 뭔가 이래야 될 텐데, 보면 이게 활동사진이지 영화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의문이 나기 시작했고 처음 한 게 <악야>(1952)다. <악야>라는 건 <지옥화>(1958) 비슷한 얘긴데, <지옥화> 이전, 초기 <지옥화>라고 봐야갔지. 양부인 얘기니까. <백민>이라는 잡지에 나온 건데, 석장짜린가 넉장짜린가 김광주의 단편이다. 어떤 날 밤에, 비오는 날 밤에 가다가 차에 치인 것이, 지프차에 치인 것이 양부인 찬데 그게 옛날 가르치던 여학교 제자다. 그 집에 가 자면서 양부인은 여러 가지 상황을 겪고 아침에 나간다. 하룻밤 얘기지. 어느 날 보니까 지나가는 애들이 돌 던지면서 “양갈보, 양갈보”하더라, 그런 게 끝인데, 그게 그때는,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아가지고, 감격스러워서, 단편을 장편으로 만들었다. 그게 첫 작품 됐는데 지금 있었으면 아마 한국영화에 ‘리알리즘’의 첫 작품일 거라고.

누구나 대략 첫 작품이 제일 좋은데, <두만강>(<두만강아 잘 있거라>)을 찍었든 뭘 찍었든 간에 임권택이 것도 첫 작품이 제일 좋다. 내 것도 그렇게 보고 있고, 그건 뭔고 하니 기술의 집대성이다. 자기가 있는 기술을 다 썼으니까. 그때는 뭐 흥행이고 뭐고 생각도 안 하고 덮어놓고 찍는 것만 열심히 찍었던 시대니까. 이게 지금 남아 있으면 여러 가지로 재미가 있을 텐데…. 근데 용케 <피아골>이라는 작품은 남아 있다고 그래. 같은 시대 작품인데.

<악야>를 예술협회에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 것은, 그러니까 그때는 항상 머리에 생각하고 있는 게 영화운동, 개인의 회사 이름이 아니고 새로운 ‘무브먼트’를 생각하는 거라. 우리가 대표한다, 영화예술을. 그런 그룹이다, 하는 인식이 강해서, 아마 그런 식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밤낮 그렇게 이름붙였다고. 신극협의회란 신협 아냐? 연극에는 극예술협회라고 유치진씨가 맨든 거거든? 그러니까 새로운 연극 운동, 새로운 영화 운동, 이렇게 하면서 영화예술협회라는 게 있는 건데, 혼자지 뭐. 상상의 이름이지. 혼자 도취해가지고 찍은 것이지. 그러니까 6·25 때 우리가 도망했다가 9·18 수복했는데, 잘 데가 없었다. 나는 폭격당한 사무실에 가서 책상 위에 신문지 깔고 자면서 극영화예술협회해야 되갔다, 폐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행복한 사람들이지. 대담 신상옥·김소희·이기림정리 이기림/ 영화사 연구자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