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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물에 빠진 날

민주당이 대선자금 내역을 공개했다. 말이 ‘공개’지 공개된 것은 하나도 없다. 민주당이 공개랍시고 한 것은 사실상 선관위에 신고용 공개 액수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민주당이 대선 기간에 그 정도 액수만 썼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액수는 선거대책본부가 발족한 이후에 쓴 것만 포괄할 뿐, 지난해 4월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결정된 이후에 사용된 “사실상의” 대선자금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희망돼지와 온라인으로 들어온 국민성금은 50억원 정도라 하나, 그나마 확실한 것은 30억원뿐, 나머지는 정체가 애매하다고 한다. 설사 50억원이라 해도 그 액수라면 민주당이 선거 치르고 남긴 이른바 ‘잔여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민주당은 굳이 국민성금이 없었어도 대선을 치르는 데 별 지장이 없었던 셈이다. 당시 희망돼지는 ‘참여정치’의 표본으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으나, 그 참여정치의 실상은 허탈하게도 이렇게 누추한 것으로 드러났다.

누추하면 희망이 아닌가? 아니다. 누추해도 희망은 희망이다. 아니, 희망은 원래 누추한 것, 문제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돼지가 주제를 모르고 거대해졌다는 것이다. 다분히 조작된 여론에 한껏 흥분한 돼지는 시퍼런 헐크 돼지로 돌변해 “나는 서민의 돈 먹는 돼지. 민주당 총알은 내 배 안에 들어 있다”고 외쳤다. 몸집만 속이지 않았더라도 돼지는 희망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제 몸집을 불린 돼지는 더이상 희망이 아니다. 부풀려진 그만큼 달콤한 환각이며, 교활한 동원 이데올로기다.

부풀려지지 않은 그만큼은 희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온전한 희망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돼지는 대선이라는 빅 이벤트에 걸었던 판돈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 대선 끝났다. 돼지가 희망이려면 그 작은 몸집만큼이라도 민주당의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돼지가 참여정치의 실현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선거 뒤 돼지 치던 이중 민주당의 진성당원이 된 이는 얼마나 되며, 선거 끝난 뒤에도 민주당에 깨끗한 돈을 보낸 이는 또 얼마나 될까?

누가 희망돼지를 물에 빠뜨렸는가? 그 돼지의 배꼽에 바늘을 꽂고 열심히 공기 펌프질을 했던 유명인들, 지식인들, 매체들이다. “노무현은 희망돼지만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다.” 어느 노란 배우가 TV에 나와서 공언한 이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 말은 현실의 기술(記述)이 아니라 미래의 염원이었어야 한다. 민주당의 이데올로기들은 이 미래의 바람을 슬쩍 현실의 기술로 바꿔놓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데에 써먹었다. 한마디로 희망돼지를 감동적 정치극의 소품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민주당 ‘대선백서’에서 어느 노란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당의 경우 (…) 몇백개의 기업에서 100억원 이상의 모금을 하였는데 (…) 노무현 후보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부유한 소수에게서 거액의 후원금을 걷지 않고 평범한 다수에게서 소액 후원금을 받아 선거를 치렀다는 점이다.” 순진하게 이 이데올로기를 믿고 11만명이 모금에 참여했다. 그중 일부라도 희망돼지에 환멸을 느낀다면, 이 뻔뻔한 거짓말을 유포했던 분들은 이제라도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노란 시인은 말한다. “비용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한 주체가 바뀌었다.” “선거에 들어가는 비용을 누가 지불하는가는 정치권의 활동의 최대 수혜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항이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비용을 지불한 주체는 바뀌지 않았다. 희망돼지는 대선 잔여금 수준, 자금의 대부분은 기업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민주당 활동의 최대 수혜자가 누가 될 것인가? 민주당은 누구의 정당이라고 해야 할까? 시인은 민주당이 서민의 정당이라는 자기최면에서 깨어나 이 냉엄한 현실을 이제는 추인할까?

시민의 정치참여는 좋은 일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은 바람직한 일이다. 희망돼지는 더 장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돼지의 배에 동전을 집어넣으며 정치적 환각의 매트릭스에 빠지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보수정치의 시스템을 그대로 놔둔 채 그들의 선거자금만 모아준다고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겠는가? 11만명이 들러붙어 그 난리를 쳤는데도, 시민의 몫은 10%에 불과했다. 그게 돼지가 품은 희망의 정확한 함량이다. 희망은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희망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