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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인간의 똥은 썩지 않아,<리사이클링>

하늘마저 버린 것 같은 황폐한 쓰레기 폐기장. 주위는 온통 처분을 기다리는 고철 덩어리뿐이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간간이 불어오는 먼지바람밖에 없는 이곳에, 어느 날 처량한 몰골의 강아지가 찾아든다. 산전수전 다 겪고 마지막에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을 게 틀림없는 강아지는 놀라워라, 운 좋게도 음식이 들어 있는 캔을 발견한다. 냉큼 달려들어 덥석 물지만, 단단한 포장을 어찌할 수 없다. 아, 역시 난 뭘 해도 안 돼.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갈고 닦은 재주라고는 눈치 보는 것밖에 없는 강아지는 이번에도 좌절한다.

어? 그때 고철더미 속에서 뭔가 움직인다. 또 뭐야! 잔뜩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는 강아지 앞에 망가진 로봇이 삐걱삐걱 일어서더니 캔을 집어든다. 앗! 비겁한 놈! 너에게 빼앗길 순 없어! 나도 이제 막판이라고!! 인상 팍 쓰면서 머리 굴리는 강아지 앞에 로봇이 내민 것은 뚜껑을 딴 캔이었다. 로봇과 강아지의 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재모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 <리사이클링>은 마지막 희망마저 오래 전에 사라졌을 법한 황폐한 상황에서 대사나 비약없이 훈훈함을 피워올린다. 10분28초로 펼쳐지는 이 작품의 배경은 환경오염이 극에 달한 미래. 핵폐기장이니, 새만금이니, 환경문제가 연일 화두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흙에서 태어난 풀은 흙으로 돌아가고, 번식하는 동물도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상하게 인간이 편리를 위해 만들어낸 것들은 죽어서 순환하지 않고 잔재를 남긴다. 스스로 자연의 순리를 갉아먹는 인간이 나중에 그 대가를 느끼게 될 즈음에는 너무 거대해져 어찌할 수 없는 잔재를 보게 될 것이다. 이제라도 갉아먹은 자연의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이 제작의도를 밝히는 박재모는 광고회사와 영국 유학을 거쳐 현장에서 활동 중이며 지금까지 스톱모션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재활용품을 이용한 정크 아트는 오랫동안 해온 작업방식이다. <리사이클링>은 그의 모든 것이 총합된 작품인 셈이다.

이미 잘 알려진 유명작인 <리사이클링>은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으로, 2002년 동아LG페스티벌 우수상, 대한민국애니메이션영상대전 문화관광부 장관상, 춘천애니타운페스티벌 춘천시장상 등등을 수상했다. 작가가 대표로 있는 AIM프로덕션 홈페이지(http://www.aimproduction.co.kr/)에서 좀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독립애니메이션과 CF를 전문으로 하는 AIM프로덕션은 스톱모션과 3D 결합에 치중하고 있다고 한다.

만물의 왕이라고 자만하는 인간이 베풀지 못하는 사랑을 대신 실현하는 로봇은,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새싹에게 줄 한 방울의 물을 만들어내는 데 쓰고 죽어간다. 보면 볼수록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은 온통 잿빛인 황량한 상황에서 따스함을 만들어내는 저력 때문일 것이다. 그 저력의 가장 큰 원천은 뭐니뭐니해도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다.

로봇이 잘려나가는 팔을 부여잡고 버둥거릴 때, 강아지의 커다란 눈이 죽어가는 로봇을 지켜볼 때, 그리고 강아지의 슬픈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초록빛 새싹이 빛을 발할 때… 가슴은 뭉클해진다.

인간이 벌인 일을 수습하는 것은 가슴 넓은 로봇이 아니라 일을 벌인 장본인,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대가를 받는 것도 역시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게 된다. 동시에 언젠가는 이렇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보면서도 가슴이 찡하지 않은 날이 올까봐 무서워졌다.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