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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18호(1946~1947)
이유란 2003-08-04

영화사신문 제18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46 ~ 1947

비우호적 증인 19인의 청문회 출석을 앞두고, 험프리 보가트(맨 앞줄 오른쪽)와 로렌 바콜, 존 휴스턴, 빌리 와일더 등 ‘수정헌법수호위원회’ 회원들이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들의 권리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광풍

하워드로슨 등 진보10인 소환되자 제작자들 동조

‘할리우드 10’이 할리우드에서 설 땅을 잃었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1947년 11월25일 발표한 ‘발도르포 선언문’에서 “이들은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제작자들은 11월24일 국회가 할리우드 10을 ‘국회 모독죄’로 소환한 데 동조해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국회는 반미조사위원회(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이하 HUAC)의 국회청문회에서 반우호적 증인으로 불려나온 이들에게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하자, 국회모독죄를 걸어 이들을 소환했다.

HUAC는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지난 9월, 43명의 할리우드 영화인에게 청문회 소환장을 발부했다. HUAC는 이들을 ‘우호적 증인’과 ‘비우호적 증인’으로 나뉘었는데, 반공산주의자인 잭 워너, 루이스 M. 메이어 등이 우호적 증인으로, 공산당원이거나 동조자라는 의심을 받은 에드워드 드미트릭, 달턴 트롬보 등 19인이 비우호적 증인으로 분류됐다. 먼저 10월20일 잭 워너를 시작으로 우호적 증인이 청문회에 소환돼 ‘그들의 이름을 불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들은 순순히 요구에 따랐다.

하지만 그 다음 주에 있었던 비우호적 증인들의 증언은 달랐다. 이들은 HUAC의 요구에 불응하기로 미리 짜고 HUAC의 질문을 거부했다. 첫 증인인 시나리오 작가 존 하워드 로슨의 증언 때부터 분위기는 거칠었다. 로슨은 질문에 응하는 대신 미리 준비한 선언문을 읽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HUAC 의장인 파넬 토마스가 이를 거절하자 로슨은 HUAC와 토마스를 공격하는 일장 연설을 시작했고 이에 격분한 토마스는 로슨에게 청문회장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로슨은 “당신은 독일의 히틀러야, 이건 히틀러의 모략이라고”라고 외치면서 방을 나섰다. 다른 증인들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10월30일 파넬 토마스는 갑작스럽게 청문회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11명의 증언자 중 10명에게는 ‘할리우드 10’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나머지 한명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프랑스로 떠났다.

하지만 사태는 그 정도에서 해결되지 않았다. 공사주의자라는 혐의를 찾는 데 실패한 국회는 11월24일 이들을 ‘국회 모독죄’로 소환했다. 같은 날 할리우드 제작자 50인은 뉴욕의 발도르프-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비공개 회의를 열고, 다음날 ‘발도르프 선언문’을 발표했다. 한편, 이들에 대한 정식 재판은 1948년 봄에 시작될 예정이다.

제1회 ‘칸’축제 성황리 폐막와일더, 로셀리니 등 공동 그랑프리 11명

1946년 10월5일 칸영화제가 첫 번째 항해를 끝냈다. 전후 침체된 프랑스영화, 나아가 유럽영화를 활성화할 목적으로 개최된 칸영화제는 ‘경쟁’보다는 ‘축제’에 의미를 두었으며, 그에 걸맞게 참가국들이 골고루 상을 나눠가졌다. 어떤 참가국도 수상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애초의 ‘시상 지침’이었다. 이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 데이비드 린의 <밀회>,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장 들라누아의 <전원교향곡> 등 11개 작품에 공동으로 그랑프리가 수여됐다. 남녀주연상은 각각 <잃어버린 주말>의 레이 밀란드와 <전원교향곡>의 미셸 모르강에게 돌아갔다.

칸영화제 개최에 대한 논의는 1938년 두명의 저널리스트에게서 시작됐다. 베니스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에밀 빌레르모(Emile Vuillermoz) 와 르네 장은 프랑스에도 영화제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당시 교육예술부 장관인 장 제이에게 영화제 개최를 건의했다. 무솔리니의 주도로 시작된, 그래서 정치색이 짙은 베니스영화제와 다른 성격의 영화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종전 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우방이 된 상황에서 칸과 베니스 사이에 무모한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두 영화제 집행위는 해마다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를 번갈아 열기로 했다.

한편, 칸영화제 이외에도 자국영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유럽 각국들은 국제영화제를 추진하고 있다. 1946년 로카르노,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가 첫 번째 행사를 치르며, 1947년에는 에든버러영화제가 시작될 예정이다.

코미디 영화의 거장, 루비치 잠들다

1947년 11월30일 에른스트 루비치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살. 신작 <모피코트를 입은 그 여자>(That Lady in Ermine)를 찍던 중이었다. “프랑스의 파리보다 파라마운트의 파리가 더 좋다”던 이 독일인 감독은 바라던 대로 미국 땅에 묻힌다. 부유한 유대인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4년 영화계에 입문한 뒤 1921년 할리우드로 건너왔다. 메리 픽포드가 팜므파탈로 출연한 <로지타>가 그의 할리우드 첫 작품이었다. 그는 주로 사랑을 찾는 상류층의 간통, 속임수, 그리고 자기 기만을 위트와 풍자로 엮어짠 섹스코미디를 만들었다. 그런 그의 영화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단어가 바로 ‘루비치 터치’였다. 제작사 홍보부서에서 ‘광고용’으로 만든 이 신조어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지 모호하긴 했지만, 이 단어는 이후 꼬리표처럼 루비치를 따라다녔다.

여배우의 변신은 무죄?하라 세스코, 전쟁 끝나자 친군부 이미지 벗기 러시

여자의 변신은 무죄? 1945년 일본 패전 뒤 여배우 하라 세스코가 숨가쁘게 이미지를 변신하고 있다.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내 청춘 후회없다>(1946)에서 반전운동가의 아내로 군국주의가 패한 뒤 농촌 개혁의 선두에 서는 진보적인 여성으로 나온 데 이어 <안조가의 무도회>(감독 요시무라 고자부로, 1947)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며 늙은 부친을 격려하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로 분했다.

이런 하라의 이미지에 관객은 당혹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전시에 그녀가 맡았던 역할은 주로 군인이나 경관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출세작은 독일 나치와 일본 군부가 합작한 1936년작 <사무라이의 딸>로, 조연에 머물던 그는 괴벨스가 격찬한 이 영화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그뒤 친군부적인 영화에 출연해왔다. 그의 이미지 변신이 급작스러운 것도 이런 이유다.

<빅 슬립> 하워드 혹스 감독주제:“아무도 모르니까 더 재밌는거 아닐까”

1946년 하워드 혹스(Howard Hawks)의 필름누아르 <빅 슬립>이 개봉했다. 영화는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가 스턴우드 장군의 두딸 주변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조사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리며, 혹스의 42년작 <소유와 무소유>에서 호흡을 맞춘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이 다시 주연을 맡았다. 1945년 완성된 이 영화는, 그러나 다른 워너의 영화들을 다 풀고 난 뒤 개봉하겠다는 잭 워너의 뜻에 따라 개봉이 이듬해로 밀렸다. 그리고 그 사이 제작사와 로렌 바콜 에이전트의 요구에 따라 일부 장면이 삭제되고 바콜과 보가트가 함께 나오는 일부 장면이 추가됐다. 그런데 이 영화, 줄거리 이해가 쉽지 않다. 모두 7명이나 죽는데 그들이 왜, 어떻게 죽는지 암만 봐도 모르겠다. 이럴 때 감독의 설명을 들으면 좀 나으려나 했더니, 이 감독 “나도 모른다”고 말한다. 시치미를 떼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그의 얘기를 좀더 들어보자.

정말 모르나. 나도 줄거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겠다. 대시엘 해밋의 원작을 읽고 재미있어서 영화화를 결정했다. 8일 동안 작가들과 시나리오를 쓰는데 줄거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해밋에게 물어봤더니 그도 모른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감소되는 건 아니다. 주인공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평론가라고 해서 더 나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관객 입장에서는 더 재미있지 않겠나?

정말 당신에게 플롯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다. 원작자도, 작가도, 나도 누가 누굴 죽였는지 모른다. 중요한 건 ‘재미’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를 찍으면서 나는 모든 장면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애썼다.

영화 완성 뒤 일부 장면들을 추가했는데. 촬영이 끝나고 8개월 뒤에 제작사가 두 사람이 나오는 장면을 추가해달라고 주문했다. 둘의 장면이 충분하지 않다는 거였다. 경마 얘기를 빗대 두 사람이 사랑 싸움을 벌이는 장면도 이때 추가됐다. 그때 마침 내가 있던 산타아니타는 경마 시즌이었고 내게도 말 몇 마리가 있었다. “누가 거기에 탔느냐에 달렸죠”라는 그 장면 마지막 대사는 경마에 대한 내 생각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빅 슬립’이란 영화 제목은 무얼 뜻하나. 잘 모르지만, 죽음을 뜻하는 것 같다. 아무튼 어감이 좋지 않나?

날개 잃은 `순진한 이상주의자`프랭크 카프라, <멋진 인생> 참패 뒤 영화사 매락 `힘겨운 나날`

독립영화사를 팔고 다시 메이저 스튜디오 휘하로 들어간 프랭크 카프라가 힘겹게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 발발 전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던 이 흥행감독은, 단 한번의 실패로 모든 걸 잃었다. <멋진 인생>이 문제였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가, 역시 전쟁터에 돌아온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만든 이 영화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긴 했으나 흥행에서 실패했다. 그리고 파이낸싱과 배급을 맡았던 RKO는 그의 차기작 <결합의 상태>에 대한 파이낸싱을 거부했다. 이에 돈줄을 찾아 할리우드를 전전하던 그는 파라마운트에 ‘리버티 필름스’를 팔아넘겼다.

창작에서 완전한 자기 실현을 꿈꾸던 카프라는 1944년 말, 전 콜럼비아 이사였던 샘 브리스킨과 함께 독립영화사인 ‘리버티 필름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945년과 1946년 각각 윌리엄 와일러와 조지 스티븐슨이 여기에 합류한다. 창립 초 이 영화사 미래는 밝아보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회사를 “선도적인 진짜 인디펜던트”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버티 필름사 로고를 단 첫 영화 <멋진 인생>이 나오자 상황은 바뀌었다. 이 영화의 실패로 빌리 와일더와 조지 스티븐슨이 리버티 필름사에서 첫 영화를 내놓기도 전에 영화사가 매각된 것이다.

파라마운트는 세 감독에게 ‘3년간, 3편의 영화제작’을 보장했다. 반면 창작의 자유와 저작권은 엄격하게 제한하려 들었다. 무엇보다 제작비 지원이 까다로웠다. 파라마운트는 평균 흥행수익인 300만달러의 절반인 150만달러를 제작비의 상한선으로 묶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카프라가 책정한 제작비는 늘 이를 상회했고, 파라마운트는 제작비를 이유로 그의 기획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상황은 윌리엄 와일러와 조지 스티븐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제작비를 이유로 파라마운트는 스티븐슨의 신작 <나 엄마가 기억나>의 제작을 거부했다. 카프라는 바로 이러한 스튜디오의 제약없이 마음껏 영화를 만들기 위해 리버티 필름사를 차렸던 것이다. 하지만 독립영화사를 통해 “한 감독, 한 영화”(one man, one film)라는 이상을 구현하려던 카프라의 꿈은 완강한 현실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단 신 들

할리우드 최대 수익 ‘돈방석’

1946년이 ‘할리우드 최고의 해’로 기록됐다. 할리우드는 올해 1945년의 6330만달러보다 월등히 많은 1억1990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사상 최대의 수익을 올렸다. 박스오피스 수익은 16억9200만달러에, 주간관객 수 또한 9천만명에 이르렀다.

프랑스 국립영화센터 설립

1946년 10월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국립영화센터(Centre National du Cinema Francais 이하 CNC)를 설립했다. CNC는 앞으로 프랑스 영화제작에 대한 감시와 지원 정책을 동시에 펼치게 된다. 곧 금융 지불 능력에 대한 기준을 확립하고 영화제작 보조금을 지급하고 기록영화와 예술영화를 지원하면서 이를 통해 영화산업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또한 영화학교인 이덱(IDHEC)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도 CNC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해롤드 러셀, 최고의 특별한 배우

<우리 생애 최고의 해>에서 전쟁에서 두팔을 잃고 쇠고랑을 단 퇴역군인으로 출연한 해롤드 러셀이 1947년 3월13일 열린 제1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과 특별상을 한꺼번에 받았다. “동료 군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이 특별상 수상의 이유였는데, 실제로 전쟁터에서 영화와 똑같은 부상을 입었던 퇴역군인인 그는 극중에서 부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오랫동안 사랑해온 여인과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한편, 1130만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밀어내고 할리우드 역대 최고 흥행작의 자리를 꿰찬 이 영화는 감독상과 작품상을 포함, 모두 7개의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클루조 감독, <제니 라모르>로 복귀

1947년 10월 프랑스 감독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복귀했다. 그를 불러낸 사람은 평소 클루조를 존경해온 배우 루이 주베. 클루조는 주베 덕에 3년 만에 촬영현장으로 돌아와 신작 <제니 라모르>(Quai des Orfevres)에 착수했다. 클루조는 독일 기업인 컨티넨탈의 자금으로 만든 1943년 작 <까마귀>가 반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1944년 프랑스가 나치에서 해방된 직후 영화제작을 금지당했다.

카잔 연기학교 설립, 메소드 연기법 교육

1947년 10월 엘리아 카잔이 ‘액터스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교육 내용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메소드 연기법’. 카잔은 이미 1930년대 그룹 시어터에서 소련인인 스타니슬라프스키가 개발한 이 자연주의적 연기법을 실험해왔다. 메소드 연기법의 핵심은, 배우의 창조성은 내면에서 나오며 따라서 배우들이 개인적 경험에 기초할 때 사실적인 연기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