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예수의 얼굴
김규항(출판인) 2003-08-23

‘주일 성수’를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라 여기는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아들을 늘 근심한다. 어머니의 근심이 어머니의 신앙 때문이듯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도 내 신앙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개의 한국 교회란 한국인들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인 ‘돈’교의 지회에 불과하며, 적어도 예수와는 별 상관없는 곳들이다. 교회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대리석 첨탑에 네온 십자가를 단 건물이라고 해서 교회가 되지 못할 법은 없지만 나에겐 예수를 팔아먹는 곳에 앉아 예수를 생각할 만큼의 인내심이 없다.

아내가 고창으로 연수를 떠난 일주일 동안 어머니가 살림을 도우러 왔다. 늙은 어머니는 오랜만에 아들 손주 밥을 챙겨주는 일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어머니의 즐거움을 위해 나도 안 먹는 아침을 꼬박꼬박 먹는다. 사흘째 아침엔가 김단과 김건이 제 친구들을 따라 여름성경학교에 가겠다고 나섰다. 어머니는 반색을 하면서도 짐짓 “아빠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한다. 나는 두말없이 허락한다. 종교적 평화는 다른 이의 신앙을 ‘같은 정상을 향하는 다른 등산로’라 생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차조심하거라.” 신바람이 나서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그들에게 종교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들이 가는 교회가 크게 나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때론 좋은 것보다 나쁜 걸 알아보는 게 더 약이 될 수도 있으니 그저 지켜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오늘부터 제 앞에 나타나는 이런저런 종교적 재료들을 제 삶과 세상의 진실에 반추해가며 제 나름의 것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아이들은 어둑해져서야 돌아왔다. “고래의 전설 0장0절!” 혼자 성경 구절을 중얼거리던 김건이 외친다. 제가 공룡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의 귀엔 ‘고린도전서’도 그렇게 들린다. 김건이 내 무릎에 앉아 묻는다. “아빠, 일곱살 중에 교회 데리고 갈 아이가 있을까.” “글쎄, 그건 건이가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친구 데려오면 스티커 주는데 스티커 모으면 상 준대.”

나는 그런 식의 판촉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김건에게 설명할 말을 한참 생각하다가 접는다. 일곱살짜리 아이가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이거나 내가 일곱살짜리 아이에게 그 문제를 설명할 능력이 없다. 김단은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 열심히 그린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고 그 위론 횃불 같은 걸 죽 늘어놓았다. 그런데 예수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다.

“여자니?” “응.” “예수님이야?” “예수님은 아니고….” “단아, 여자 예수를 그려도 되는 거야.” “예수는 남자잖아.” “그래, 예수는 남자였지. 그런데 예수는 여자에겐 여자이고 흑인에겐 흑인일 수 있는 거야.” “무슨 말이야, 아빠.” “교회에서 예수 그림 본 적 있지.” “응.” “어떻게 생겼지.” “백인. 머리 길고 얼굴 하얗고.” “그건 백인들이 자기 마음속의 예수를 그린 거야. 단이도 단이 마음속의 예수를 그리면 되는 거야.”

김단은 알아들을 것 같다는 표정이다. 나는 더 할말을 속으로 떠올려본다. ‘예수는 2천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김새는 우리가 흔히 테러리스트의 얼굴로 떠올리는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예수의 실제 얼굴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얼굴이다. 예수는 언제나 억압받고 슬픔에 빠진 사람의 편이었다. 예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며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며 잘난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내 마음속의 예수를 김단이 그리게 하기보다는 김단이 제 마음속의 예수를 그려서 언젠가 그가 그린 예수의 얼굴에 내가 감동받는 쪽을 선택한다.김규항/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