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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마인드

“패턴에 대한 집착을 자제하고 있지.”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인 내시는 뛰어난 수학자로 촉망을 받던 젊은이.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CIA의 부탁으로 소련 스파이들이 주고받는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착란에 빠진다. 매일 신문이나 주간지의 광고란에서 규칙적인 패턴을 찾아 해독하고, 그 결과를 자신이 연락 포스트라 믿는 어느 외딴 곳의 우편함에 집어넣곤 한다.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동료들에 의해 그가 병세가 발견되고, 아내의 도움으로 결국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그뒤의 그의 삶은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는 거짓 ‘환영’과 자신이 착란증에 걸렸다는 참된 ‘의식’ 사이의 싸움으로 점철된다. “패턴에 대한 집착을 자제”하는 것이 바로 그가 거짓 환영과 싸우는 데 사용하는 전략. 패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종종 헛된 환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시의 착란증은 실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다. 소련 스파이들이 미국 국내에 몰래 핵무기를 들여오려 한다는 굳은 믿음, 그 두려움이 광고의 기호 패턴에서 소련의 암호문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시작된 미·소 냉전. 그것이 야기한 ‘레드 콤플렉스’라는 집단 히스테리가, 유달리 섬세한 감성을 가진 한 개인에게 과잉 스트레스를 주어 그를 착란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내시만큼 똑똑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내시들이 있다. 가령 북한의 남침 땅굴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유사성을 들어 자기들이 발견한 게 남침 땅굴이라 굳게 믿는다. “이 나라에 간첩이 5만명이 있다”고 말한 박홍씨 역시 몇 가지 유사성을 들어 이 나라가 북한 간첩들의 소굴이라 착각한다. 얼마 전 시청 앞에서 인공기를 불태우며 난동을 부린 모지리들에게 노무현 정권은 북한과 내통하는 좌파정권이다.

착란에 빠져 평생을 고생한 내시는 1994년에 노벨상을 받는다. 그가 젊은 시절에 만들어낸 ‘내시균형’의 이론이 뒤늦게 진가를 인정받은 것이다. 내시균형을 설명할 때 흔히 ‘수인의 딜레마’라는 예를 든다. 가령 체포된 두 공범에게 경찰이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1년, 한 사람이 자백하면 그는 바로 풀어주되 자백을 안 한 자는 10년, 둘 다 자백하면 5년형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자. 이 게임의 결말은 결국 둘 다 자백을 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게 이 게임의 ‘내쉬균형’이다.

범인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건 자기만 자백하고, 상대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 이 경우 상대는 10년형을 받겠지만 자신은 곧바로 풀려나니까. 하지만 상대방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라고 자백을 안 하겠는가? 그리하여 모두 자백할 경우 둘 다 5년형을 받게 된다. 반면 두 사람이 상대를 믿고 묵비권을 행사한다면, 모두 1년형만 받는다. 이게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이나, 불행히도 이 게임의 ‘내시균형’은 둘 다 자백하고 5년형을 받는 것이다.

개인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 전체를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난 50년간 남북관계는 정확히 이 ‘내시균형’ 위에 서 있다. 남북이 서로 이득을 보는 최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속는 최악을 피하려 둘 다 손해를 보는 차악을 택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있다. ‘수인의 딜레마’의 경우 두 사람이 각각 독방에 갇혀 서로 소통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을 전제한다. ‘내시균형’에서 벗어나려면 바로 이 전제를 깨야 한다.

그래서 남북간에는 대화가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 상호신뢰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50년간의 냉전적 대립을 통해 우리는 남북이 서로 대화를 끊고, 불신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배웠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바꿔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기가 불타오르는 우익 광란의 현장에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멀뚱히 얼굴을 내민다. 이건 수학적 명증성을 갖는 정치적 오류라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은 이제 명확히 입장을 정해야 한다. 인공기 태우며 “김정일 타도”를 외칠 것인가. 아니면 대화와 교류로 남북간 신뢰를 구축할 것인가. 언제까지 앞에서는 대화와 교류를 얘기하며, 뒤로는 착란증 환자들의 반공데모나 거드는 기회주의적 작태를 계속 할 건가? 도대체 그 당의 당론이 뭔가? 남북관계라는 중대한 문제에조차 명확한 당론 하나없이 횡설수설하는 게 무슨 당인가? 닭장이지. 꼬꼬댁 꼬꼬….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