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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바람난 가족>을 보고 남성이 만든 여성영화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부조리한 쿨함 같으니!

마돈나와 조디 포스트가 자발적인 미혼모로 나섰을 때 세상은 놀라워서 한동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약속한 듯 거의 동시에 갈채를 보냈다. 먼저 박수를 친 것은 여성이었지만, 곧이어 언론도 ‘시대를 앞서가는 행보’로 맞장구 쳤다. 한국 언론에도 ‘아비없는 호로 새끼’를 낳아 기른다는 논조는 없었다. 아니, 미혼모에 대한 세상의 통념이 어느새 이렇게 바뀌었단 말인가!

서울의 평범한 20대 회사원이 그랬다면 세상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리 몸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행여 모르겠다고 생각되면, 내 누나 혹은 여동생이 그런 결단을 고지했을 때 ‘나’의 반응이 어떠할지 상상해보라. 평소에 미국 언론이 평범한 미혼모를 보는 삐딱한 시선도 ‘개인주의’와 ‘인권’이라는 좀더 두터운 거름종이를 거친다는 것뿐 한국과 뭐 그리 다르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은 왜 마돈나와 조디 포스트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냈을까? 짐작하건대, 이들 여성은 미혼모를 배제하면서 사수하고픈 가부장제의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평생 놀아도 살 수 있는 돈 이미 벌어놓았고, 앞으로도 환금 가능한 명성은 지속될 테고, 미모가 출중해서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연애해줄 남자 줄설 게 뻔한데, 도대체 이들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겁을 준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이데올로기는 총명해서 이런 경우에 감당할 수 없는 적을 칼로 내리쳤다 망신을 당하느니 차라리 숭배하는 쪽을 택한다. 그래도 가부장제는 손해볼 게 없다. 마돈나에 대한 숭배의 제스처는 미혼모 마돈나에 대한 갈채가 아니라 그걸 가능케 하는 물질적 권능에 대한 경배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미혼모’가 가부장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 온전한 삶을 이룬 여성의 상징처럼 유통되지만, 그걸 이룰 수 있는 길이 ‘돈’밖에 없다는 자각은 페미니즘에 대한 각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뼈저린 확인이다. 그래서 진실로 자발적 미혼모를 꿈꾸는 여성에게 마돈나의 이미지는 자신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새삼 환기시켜줄 뿐이다. 마돈나는 긍극적으로 문화적 희망이 아니라 경제적 절망의 환유로 작동한다.

종종 슈퍼맨 흉내내서 다리에서 날아올랐다 제명 못 채운 초등학생 얘기가 신문에 나온다. 마돈나는 보통 여자들이 흉내내기는 아직 너무 멀리 있는 여자 슈퍼맨이다. 나는 마돈나가 페미니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페미니즘의 탈을 쓴 미국 자본주의의 첨병처럼 보인다.

<바람난 가족>에서 문소리가 고등학생의 아이를 갖고 미혼모로 독립을 선언하는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변변한 직업도 없는 여자가 돈 잘 버는 변호사 차버리고 나가는 장면, 정말 멋있지 않은가? 그 다음에, 돈 벌러 나가고, 아이 낳고,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하는 숨 막히는 현실이 없다면 말이다. 일찍이 YS가 통찰했듯, ‘겡제’는 중요하다. 경제는 개인의 몸도 변화시킨다. 이 영화의 후일담에 해당할 ‘바람났던 가족’에서 문소리의 육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라. 시간에 쓸리고 노동에 마모되면서 찌그러진 남루한 육체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바람난 가족>은 이미 현재 속에 투영돼 있는 미래의 이 그림자를 말끔히 지워버린다. 이 영화는 여성의 몸에 클리토리스가 박혀 있다는 즉물적 사실을 거듭 환기시키지만, 여성의 몸이 경제 속에 포획돼 있다는 유장한 진실은 한 가닥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남근과 클리토리스의 ‘쿨’한 교환은 있되, 남녀의 ‘핫’한 소통은 거세하고 출발한다. 이건 일종의 남성 판타지다. 즉, 사회경제적 권력관계의 외곽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평등에 대한 상상이다. 여기서 여성 상위는 여성이 능동적으로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체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자의 성적 노고를 덜어주는 체위이기도 하다. 그것이 침실 밖의 경제적 평등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단지 남성의 노고를 덜어주는 도망노예의 주체성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숱한 여성의 성적 도발이 현실에 스며들지 못하고, 등 따스운 여자들을 위한 담론의 재료로 과장되거나, 무심한 남성들의 관음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성이 만드는 여성영화는 어떤 경로든 남성 판타지가 개입하는 것 같다. 혹자는 그걸 위선이라고 한다. 나는 그냥 부조리라고 부르고 싶다. 침묵하기 어색하고 말하면 불순물이 끼어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그래도 말하는 게 낫지 않는가. 나는 그 부조리가 발전의 표식이라고 믿고 싶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