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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에 대한 단상

내가 김기덕 감독을 처음 만난 건 파리에서였다. 1996년 초 겨울로 기억한다. 그는 당시 <야생동물 보호구역> 영화 준비를 위해 파리를 헤매고 있었다. 나 역시 <인샬라> 영화 준비를 위해 한달여간 파리를 헤집고 다닐 때다. 대학가 주변의 작은 호텔에서 며칠간 함께 지냈다. 그가 나에게 기생한 셈이다. 그는 나와 달리 영화제작에 대한 아무런 조건이나 준비가 없이 혼자만 달랑 파리에 왔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무모하고 순진해 보였다. 투자자나 제작사에 대한 아무런 토대가 없이 자기만의 확신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말이다. 어쨌든 그 영화는 만들어졌고,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처음에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던 <악어> 이후에 대한 기대가 ‘혹시나’에서 ‘역시나’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명력과 열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순진함’과 ‘순수함’ 그 자체였다. 수줍은 듯 자신의 속내를 살며시 드러내는 그의 특유의 미소는 과히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저…, 호텔에서 며칠만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이렇게 그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며칠간 같이 머물면서 이런저런 많은 얘기를 나눈 것 같다. 그는 복장만큼이나 특이한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병대를 왜 지원했는지, 예전에 무작정 프랑스에 와서 어떻게 그림공부를 했는지, <악어>를 어떻게 하게 됐는지 등등 그의 삶은 엉뚱하고 도전적이었다. 한번도 영화를 공부한 적이 없었던 그가 <악어>를 만든 신화는 그 자체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영화였다. 어느 순간 나는 그의 마력에 끌려들고 있었다.

무모해 보이던 <야생동물 보호구역>은 그해 5월 촬영을 시작했다. 나는 그때 칸영화제에 들렀다가 변혁 감독, 장진 감독과 함께 촬영장을 방문했었다. 센 강변의 작은 배 안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됐지만, 배우 조재현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 조재현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주연배우이자 제작부 막내였다고 말한다. 제작환경이 어떠했을지는 미루어 짐작된다. 어쨌든 그는 파리에서 이 영화를 마쳤고, 나는 사하라 사막에서 <인샬라>를 끝냈다. 이후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는 호텔방 하나에서 6명의 감독들과 함게 뒹군 적도 있다. 지금은 모두 유명해졌지만, 소주 한잔 밥 한끼를 위해 서로가 빌붙어야 하는 시절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어울려 지내다 처음 만든 영화가 <파란 대문>이었다.

나는 <파란 대문>을 만들면서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24시간을 같이 지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지원금 3억원으로 이 영화를 마쳐야 했다. 불철주야 촬영을 강행했고, 한달 이상을 예정했던 촬영은 18일 만에 끝나버렸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 영화의 애초 예산은 6억원이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영진공 지원금 3억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의 창의력과 순발력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혹자는 그의 영화에 대해 문법의 잣대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영화는 문법보다도 정신과 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서 감독으로서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하며 탁월한 점을 보게 되었다.

<파란 대문> 이후 4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내가 <인터뷰>를 할 때 그는 <섬>과 <실제상황>을 만들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와 영화를 한 셈이다. 쉴새없이 함께 달렸다. 나의 목표는 국내외에 ‘김기덕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각 영화제를 중심으로 꾸준히 작업을 했고, 지금은 웬만큼 목표를 이룬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가슴속 한켠에는 무언가 아쉬움과 답답함이 늘 자리하고 있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픈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김기덕 감독에 대한 나의 애증의 시선인 것은 숨길 수 없다. 특히 이번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나의 관점에서는 절반의 성공이고, 절반의 실패다. 그와 좀더 치열하게 부딪히고 싸우지 못한 후회가 남는다.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 <해안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끝으로 그와는 헤어질 것 같다. 그동안 동고동락한 세월을 생각하면 못내 아쉽지만, 서로의 좀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만남과 헤어짐의 당연한 인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는 또다시 만날 것을 기대한다. 어쨌든 많이 섭섭하고 많이 속시원하다. 앞으로도 그의 건투를 빈다.이승재/ LJ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