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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머리싸움 어때? <아이덴티티>
2003-10-31

네바다주의 한적한 고속도로에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밤, 불길한 사고가 잇달아 벌어진다. 매춘부가 함께 자던 남자의 돈을 훔쳐 차를 몰고 달아나다가 하이힐을 도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뒤에 가족 세명이 타고 오던 차가 하이힐 굽 때문에 펑크가 난다. 타이어 교체 도중 차밖에 내려 서 있던 어머니가 뒤에 오던 차에 치어 쓰러진다. 그 차는 여배우와 그의 전속 운전사가 타고 있었다. 우연이 꼬리를 무는 이 일련의 사고를, 시간 순서를 뒤섞어 보여주는 발랄한 편집의 도입부는 <아이덴티티>의 한 성격을 예고한다. 관객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당신과 머리싸움을 시작하겠다, 그러나 너무 집요하게 쫓아오진 마라,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폭우로 길이 끊겨 도로변의 한 모텔에 등장인물들이 다 모인다. 살인범과 그를 호송하는 경찰관까지 이 모텔을 찾아와 인물은 모두 11명. 이 단절된 공간에서 한명씩 살해된다. 범인은 누구일까. <아이덴티티>는 스릴러 영화들이 사용해온 여러 수법을 동원해 관객의 머리를 교란시킨다. 시점이 수시로 교체되고, 죽어있던 시체가 사라진다. 인물들이 교대로 용의선 상에 올랐다가 바로 뒤에 범인일 가능성을 부정당한다. 여기까진 잘 짜여진 추리소설을 보는 듯하다. 연출도 박진감이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논리적 연산이 불가능해진다. 이게 귀신 영화인가 싶을 즈음에 ‘다중인격’이라는 변수가 등장한다.

다중인격이나 후최면 처럼 사건 전개의 비약을 가능케 하는 장치를 예고없이 갑자기 등장시키는 건 일종의 편법이다. 이 영화는 다중인격을 등장시켜 한 차례 비약한다. 지금까지 중계된 모텔에서의 살인사건은, 다중인격을 지닌 연쇄살인범의 회상이었다. 영화는 여기서 또 다른 룰을 만든다. 회상과 현재가 서로 갈등하며 동시에 진행된다. 거기까지도 나름의 긴장을 가져가지만, 결말에 이르면 트릭만 있었을 뿐 아무 것도 아닌 얘기가 돼버린다. 그렇게 끝을 맺는 것도 재주일지 모른다. 보고 나면 영화가 바로 머리에서 떠나는 것 같다. 존 쿠색, 레이 리요타 출연에 <캅랜드> <처음 만나는 자유> 등의 제임스 맨골드가 감독했다. 31일 개봉. 임범 기자, 사진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