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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릴레이] <황산벌> - 정성일 영화평론가
2003-11-04

나는 국사 교과서를 읽으면서 항상 궁금했다. 정말 그랬을까 승산없는 전쟁에 나가는 계백은 의자왕에게 아무 이의 없이 죽음을 맹세했을까 그렇게 전쟁에 나가는 계백이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참살할 때 그 아내와 자식들은 기꺼이 지아비의 칼 앞에 목숨을 내놓았을까 어린 소년 화랑 관창은 오직 그 자신의 결심만으로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서 몇번이고 죽여 달라고 홀홀단신으로 백제 진영을 향해서 달려갔을까.

이준익의 두 번째 영화 <황산벌>은 역사의 현장에 가서 가십을 파헤치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매우 비장하고 심각하지만 그래봐야 역사의 스포츠 신문지 수준이다. 스포츠 신문에도 정치와 경제는 있다. 문제는 그게 진지한 척할수록 웃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황산벌에서의 역사의 결과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결과만 끌어안고 역사의 과정이 구경거리가 될 때 믿음의 원인이 괄호쳐진 선택은 비이성적이거나, 미친 짓이거나, 공허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멋있긴 하지만 황산벌에서 계백(박중훈)은 바보이고, 김유신(정진영)은 무능한 구경꾼이다.

너무 못만들었는데‥웃는다, 우리들의 비겁한 현실‥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의 약점은 매우 단순하다. 너무 못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평면적이고, 편집은 그냥 이어붙이는 수준이다. 화면은 단조롭고, 인물들은 분주하게 오가지만 대부분 방향이 맞지 않는다. 음향은 소란스럽고, 음악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오직 영남과 호남의 방언 대사만이 살아난다. 그러니까 이건 개그콘서트 야외 ‘사극 사투리’ 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들이 종종 심금을 울린다.

당나라와 삼국이 모여 하는 대사는 미국과 남북한 사이를 떠올리게 하고(노골적으로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향해 “이들을 악의 축으로 선언한다”고 말한다), 김유신은 “전쟁은 결국 미친 짓”이라고 내뱉는다. 이 영화의 대중성은 여기에 있다. 명분도 없이 이라크파병을 결정해야 하는 지금 여기에서 미국과 북한이 서로 얽혀드는 남한은 너무 직접적으로 고스란히 여기서 서로 겹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우스운 것은 남한이 지금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며, 이 영화가 비통한 것은 그러한 결정에 매달리는 우리들이 비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고 감동받았다는 말은 현실의 전도이며,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우리들의 결정을 과거의 역사 속으로 던져버리는 책임회피이다. 이걸 바꿔치면 안 된다.

이것은 영화가 주는 감흥이 아니라, 우리들의 비겁한 삶의 현실이 주는 고통이다. 그런데도 웃는다. 그것은 모순에 찬 현실을 역사와 억지로 뒤섞어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유아적으로 퇴행한 후퇴의 몸짓이다. 여기에는 통속적이고 도식적인 정치적 설명만이 있으며, 비극을 유머인 척 위장하는 냉소적 반어법이 시종일관 날뛴다. 이것은 현실의 상징이 아니라, 풍자를 빙자한 퇴행적 웃음의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거기에 머무는 것은 준비론적 패배주의의 무능한 안심이다. 그건 역사의 외설에 빠져드는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여기서 역사에 지금 여기가 재현됐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반대로 이것은 현실과 역사 사이의 비극을 정확하게 반복된 사건인 것처럼 만들어서 차이를 차단시켜 만들어낸 역사의 매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계백은 살아있는 시체이다. 그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순간마다 돌아와서 우리에게 물어볼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오. (계백의 아내의 입을 빌려) 우리들의 실리주의는 맞받아 친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 것이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 것이오. 나는 다시 한번 묻는다. 정말 그럴까 비전향장기수 김선명은 사회주의자라는 이름 때문에 전향서를 거부하고 30년을 0.65평의 감옥에 갇혀 있었을까 <황산벌>은 미어 터지고 있는데, 홍기선의 <선택>은 텅 비어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 대중들의 ‘거시기’이다. 정말, 정말로 ‘머시기’하다. 정성일/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