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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원에 4단위를 투자하는 보이,<어바웃 어 보이>
권은주 2003-11-06

“인생을 단위(UNIT)로 쪼개서 산다면 시간 단위는 부담스러우니 30분 단위로 나누는 것이 좋다. 나의 하루는 목욕 1단위(30분)/ TV시청 1단위- 주로 퀴즈 프로그램/ 인터넷 서핑 2단위(1시간)- 주로 슈퍼모델 나체 사이트/ 운동 3단위- 주로 당구/ 머리 만지기 4단위/ CD 쇼핑 2단위/ 점심시간 3단위…. 이렇게 나는 알찬 생활을 보내고 있다. 도대체 직업을 가질 시간이 있단 말인가? ” 이것은 이 땅에 크리스마스가 없어지지 않는 한 대대로 불려질 크리스마스 캐롤송을 작곡한 아버지 덕분에 그 저작권료로 살아가는 빈둥 백수 청년 <어바웃 어 보이>의 휴 그랜트가 하는 말이다. “무슨… 이런 호화스런 말을! 쳇!” 시기어린 투정도 해보지만 이거야말로 ‘남자의 로망’ 아니 ‘백수의 로망’ 아닌가….

근데 전제조건이, 이 백수는 돈이 있는 백수라 위의 사항이 가능한 것이다. 돈없고, 어딘가 주눅들고, 상처 잘 받고, 쫀쫀하고, 경제관념 확실한 백수가 우리 시대의 백수지 휴 그랜트가 분한 ‘윌’ 같은 백수. 물론 영화 속 표현처럼 ‘cooool’하게 멋있지만 흔하지 않고 실제로 보면 정말 재수없을지도 모른다(아니야 죽이고 싶을지도 몰라…). 하지만 영화 속에선 그 백수 ‘윌’과 가끔 자살기도하는 엄마 때문에 불안한 12살 왕따소년 ‘마커스’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잘 어우러져 그 백수의 계급적 위화감이고 나발이고 결국 상처받은 인간들끼리의 유사가족 만들기 놀이에 동참하게 된다. 결국엔 왕따소년이 무대에서 떨리는 가성으로 엄마를 위해 <킬링 미 소프틀리 위드 힛 송>을 부를 땐 눈물마저 난다.

우리로 치자면 뭐 학교축제에서 엄마를 위해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를 부른 격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우리를 울리고 만 이 영화…. 비디오 가게 가면 항상 빌려간 사람들이 몇달째 안 가져와서 없는 영화들 중 하나다. 모두들 울면서 소장하나보다. 또 퀴즈프로를 즐겨보는 것은 외로운 사람들 아님 무료한 사람들의 존재증명 방식인지 실제 생활에서도 영화 또는 만화에서도 아주 적절하게 잘 나온다. 만화 <헤이 웨잇>에서 주인공의 단짝친구가 어렸을 적 주인공의 실수 때문에 죽고 쭉 시간이 지나며 늙어가는 대표적 장면 중에 집에 혼자 소파에 앉아서 퀴즈프로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꼭 남 같지 않은 장면이었는데…. 각설하고 이 영화를 장황히 쓴 이유는 최근에 내가 정말 1년에 한번 치르는 대 행사인 머리를 미장원에서 해치웠기 때문이다.

사는 데 미장원과 치과가 단골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나에게 미장원이란 곳은 마치 치과에 가는 기분처럼 들어서면 항상 휘황찬란한 미장원의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앉아 있다가 나오기 일쑤다. 그리고 왠지 예쁜 여자들 사이에서 음침하게 어둠의 자식마냥 조용히 앉아 있으면 다가 와서 말을 붙이는 멋진 미용사들에게 난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한다…. 그러면 모델들 사진을 주면서 ‘원하는 스타일을 골라보세요’한다(그럼 난 사실 고를 수가 없다. 쑥스럽기 때문에…. 내가 그런다고 그들과 닮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난 손질 안 해도 될 머리를 해달라는 애매한 주문을 하고 만다. 그리고 내 머리는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지고 볶고… 오랜 시간 뒤 보면 거울엔 웬 낯선 김정영이 앉아 있다….

파마에 염색에 코팅에… 결국 나올 땐 내 손에 머리 안 빠진다는 야리꾸리한 싱가포르제 삼푸까지 들려져 있다.. 그리고 항상 몇날 며칠을 후회하며 다니곤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많이 망설이다가 두려워하며 동네 미장원에 들어갔다. 오옷, 여긴 어쩐지 나에게 말도 안 시키고 염색이다 코팅이다 뭐다 권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난 그녀가 하는 대로 안심하며 앉아 있었다. 드디어 머리는 멋지게 나왔다. 하지만 내 얼굴이 너무 큰 게 문제였다. 사무실로 들어오니 사람들은 우하하하 웃고 난 두건을 쓴 채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러는 나에게 옆에서 친구가 말한다. “야… 이 녀석아 어바웃에 나오는 휴 그랜트는 남자인데도 머리에 4단위나 소비한다고 하는데 넌 여자가 그게 뭐냐. 자주 하면서 시행착오 겪지도 않으며, 어쩌다가 가놓곤 항상 나에게 맞는 미장원이 없다고 투덜거리지도 마. 그것은 너 자신에 대한 게으름이야 이 바보야!!!!” 그래 나 게으른 가분수의 대마왕이다 어쩔래…. ‘윌’ 너 남자이면서 왜 그랬냐…. 쳇. 4단위라니….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sicksadworld@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