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컬처잼 > TV 방송가
명배우의 싹이로다,서툴러서 풋풋한 신인 연기자들
박은영 2003-11-12

요즘엔 너도 나도 연기를 너무 잘해서 탈이다. 다들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좀 지겨울 지경이다. 넘쳐나는 능숙한 연기 속에서 약간 어설픈 연기는 오히려 드라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약간 ‘깨는’ 뉴페이스를 만난 듯 호기심이 발동한다.

문화방송 주말연속극 <회전목마>에서 김남진(극중 강우석)은 ‘간만에’ 보는 신선한 연기를 펼친다. 어떤 사람은 풋풋하다고도 하더라. 약간 씹히는 발음, 어색한 표정, 뻣뻣한 자세. 신인 연기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김남진표 연기다. 우석의 과거, 현재, 미래는 이렇다.

대학생 우석은 부잣집 무녀독남이었다. 우석은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한 체인점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위장취업을 했다가 진짜 아르바이트생 은교(장서희)를 만난다. 둘은 적당히 밀고 당기다 가까워진다. 동반 유학을 앞두고, ‘수순대로’ 사건이 터진다. 우석의 집이 근거없이 몰락하는 것이다. 우석은 군대에 가고, 홧김에 탈영까지 한다. 아니나 다를까. 현실주의자인 은교는 우석을 버린다. 그리고 그는 현실에 눈뜨게 될 ‘예정이다’. 조실부모한 두 자매(은교와 진교)의 얽히고 설키는 애증의 역사 위로 우석의 사연이 보태진다.

한국 드라마의 전통을 사수하는 상투적인 스토리에 “이모와 조카 같은”(김남진과 장서희) 남녀 주인공의 캐스팅에도 이 드라마가 20%를 넘는 시청률을 보이는 이유는 김남진의 ‘어설픈 호연’이 아니고는 나로서는 도통 설명할 길이 없다. 우선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시절 우석은 ‘외로워도 슬퍼도 웃는다’ 전법을 썼다. 연기를 시작하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다. 근데 그 웃음이 도련님의 도저한 행복을 드러내는 연기였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의 웃음은 카메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짓는 당황스런 미소였다. 그의 당황스런 미소에 시청자도 당황스러웠다. 근데 시청자의 ‘이해’를 구하는 듯한 그 미소가 솔직하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깜찍한 신입사원이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짓는 어설픈 미소처럼. 집안의 몰락 뒤에는 그의 장기인 ‘비장한 얼굴’이 물을 만났다. 부잣집 도련님에서 이 나라 최하층계급, 군바리로 신분이 급전직하한 우석은 무조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울함이나 쓸쓸함 같은 복잡한 감정이 깃들 여백이 없다. 그러나 그 딱딱한 표정도 마치 바짝 ‘언’ 신병의 몸짓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했던가? <회전목마>의 게시판에 계시가 올라 있다. “김남진씨 너무 좋아요. 연기가 좀 달리던데 계속하다보면 물 오르는 날이 오겠죠?” 그렇다. ‘물 오르는 날’은 온다. 기필코 온다. 출연 기회를 보장할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고, 연기 태도도 성실해 보인다. 우리는 김남진의 연기를 즐길 의무가 있다.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이응경(극중 유명자)이 온몸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이응경이야 말로 배우 초년에 혀 짧은 발음과 어설픈 표정으로 신문 방송면의 지탄을 한몸에 받지 않았던가. 격세지감이라 했던가. <회전목마>에서 이응경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심지어 이응경은 <똑바로 살아라>에서 시트콤의 고수 박영규마저 압도하지 않았던가. 참을 인자 세개면 연기자 한명 살린다. 이미 숱한 미담이 안방 극장의 역사에 기록돼 있다.

“실땅님”을 유행시켰던 최지우도 <겨울연가>에서 ‘나름대로’ 가슴 시린 연기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심은하의 데뷔 시절을 잊었는가. 그 옛날 원미경의 혀 짧은 발음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물론 데뷔 시절의 풋풋한 연기를 고수하는 심지 굳은 배우들도 없진 않다. 그러고보면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다. 가수는 아무리 노력해도 노래가 잘 늘지 않지만, 배우는 연기를 하면 할수록 늘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는 매일같이 촬영을 하니 실전이 곧 연습일 터. 준비된 가수만이 성공할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배우도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얼굴이 받쳐줘야 하지만.

사족. <대장금>에서 수라간 최고상궁인 정 상궁으로 나오는 여운계 ‘선생님’의 연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서를 읽는 듯한 말투, ‘나 자애롭지?’ 하는 상투적인 표정, 어색한 동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드라마가 진행돼도 도통 나아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이 저럴 분이 아닌데…’. 고민스러웠다. 참다 못해 <대장금>을 함께 보던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야, 이상하게 여운계 아줌마 연기 너무 못하지 않냐?” 친구 왈. “그러게.” 곰곰이 생각에 잠긴 두 사람. 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건넨 말. “야, 설정 아냐?” 나의 맞장구. “맞다. 설정이구나.” 옆에 있던 또 다른 친구가 덧붙인 말. “참, 요즘 다리에 깁스를 했대. 그래도 저렇게 걸어다니는 연기 하잖아. 역시 명연기자야.” 모두 끄덕끄덕.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