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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독일인들, 역사왜곡에 항의하다

마틴 루터를 다룬 할리우드영화 <루터>에 신학자들의 비판 쏟아져

1517년 10월31일, 독일 동북부 비텐베르크라는 소도시 교회 정문에 가톨릭 사제 마틴 루터가 조목조목 품들여 쓴 “95개 논제”란 글이 나붙었다. 훗날 “95개조 반박문”이라 명명된 바로 그 문장이다. 그로부터 485년이 지난 올해, 제작비 420억원이 투입된 할리우드 대서사극 <루터>가 종교개혁 기념일 하루 전, 루터의 나라 독일에서 개봉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독일인들의 반발.

이 작품의 꼴을 가장 못 봐주는 쪽은 독일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마틴 루터를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200년쯤 앞서 종교적으로 구현한 개혁자가 아닌 가톨릭의 골수 원리주의자로 간주하면서, 이는 철저한 연구와 검증을 거쳐 내린 결론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영국 감독 에릭 틸이 미국 루터파 보험회사의 물량공세를 받아 그들의 비위에 맞춰 빚어낸 영화 <루터>는 역사적 사실을 잘라내고, 비틀고, 뻥튀긴 얼렁뚱땅 할리우드 사극이라는 것이다. 일단 배우들의 면면은 무척 화려하다. 피터 유스티노프 경(루터의 후견인인 지혜왕 프리드리히),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천사로 기억되는 독일 연극계의 거성인 브루노 간즈(루터의 정신적 지주 슈타우비츠), 매튜 카리에르(야콥 카예탄 추기경), 클레어 콕스(카타리나 폰 보라) 등이 나오며 루터 역은 조셉 파인즈가 맡았다. 여기에 독일 영화계의 또라이로 불리는 우베 옥센크네히트가 교황 레오 10세로 등장한다.

비판의 주체들에게는 레오 10세의 배역이 대단히 심기에 거슬리는 모양이지만, 틸 감독은 이만큼 적절한 캐스팅도 없었다는 견해다. 베드로 성당의 재건을 위해 면죄부를 판 타락한 교황, 모든 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지만 오로지 종교적 미덕만큼은 갖추지 못했던 레오 10세는 이 작품에서 멧돼지 사냥꾼으로 희화화된다. 조셉 파인즈가 열연하는 루터 역시 트집거리다. 파인즈의 루터는 민초의 영웅으로 장애란 장애는 다 극복하는 신화적 인물로 그려진다. 독일인들이 할리우드판 <루터>를 트집잡는 좀더 심오한 이유도 있긴 하다. 이 작품의 역사고증을 맡았던 미국 신학자들이 전설의 덧칠로 증명된 사실들마저 그대로 삽입했다는 것이다. 첫째, 루터는 보름스 종교재판정에서 “내가 여기에 섰나이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나이다”라고 변론한 사실이 없다. 둘째, 루터는 비텐베르트 교회의 정문을 망치로 때려부순 적이 없다. 셋째, 루터는 자신이 번역한 독문성경을 선사하고자 지혜왕 프리드리히를 만난 적이 없다. 물론 이 픽션 덕분에 피터 유스티노프 경의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에게는 환영할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루터가 살인자의 장례를 치러주는 장면도 영화를 위한 미학적 왜곡의 하나이다.

아무튼 작품을 평하는 시각이 픽션과 역사적 사실의 편차에만 집중되어 있음으로 미루어볼 때 <루터>의 영화미학적 완성도는 상당하다는 역설도 가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