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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보스턴 이벤트 현장
2001-05-24

로봇에서 ‘인간조건’을 발견하다

■ 기획 큐브릭 - 완성 스필버그, 베일 속 오프닝신 공개

태평양 상공에서 들은 얘기다. 보스턴 사람들은 ‘아메리칸’이 아니라 ‘보스토니안’이란다. 미국인이라는 평범한 카테고리로 묶이는

것보다 ‘특별한 사람들이 꾸린 별도의 공동체’로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 200년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도시이고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한수 배우겠다고 몰려드는 첨단 교육의 메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풍스런 건물들 틈에 만개한 자목련과 벚꽃, 찰스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요트 행렬. 아닌 게 아니라, 늦봄으로 접어든 보스턴은 그 풍광마저 도도해 보였다.

스 필 버 그 화 상 메 시 지, "감 정 있 는 로 봇 을 어 떻 게 책 임 지 나"

4월30일, 보스턴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는, 해외 기자들과 MIT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스탠리 큐브릭이 기획하고

스필버그가 완성한 영화 의 이벤트가 열렸다. 이 이벤트는 워너브러더스와 MIT

인공지능 연구소(AI랩)가 함께 기획한 것으로 영화 자체에 집중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점에서 먼저 눈길을 끌었다. 10분 분량의 ‘맛보기’

시사와 AI랩 박사들이 패널로 참석하는 심포지엄이 행사의 주된 메뉴였다. 그렇게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직 후반작업이

진행중인데다가 마케팅과 홍보의 포인트를 ‘신비화 전략’으로 잡고 있는지라, 뭔가 ‘색다른’ 이벤트를 마련해야 했을 터.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도

있었다. 스탠리 큐브릭 미완의 프로젝트인 와 MIT AI랩의 인연이 꽤 깊다는 사실이다.

스탠리 큐브릭은 에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9000)을 등장시켰는데, 당시 이 연구소의 창립멤버인

마빈 민스키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전문적인 조언을 해줬다는 것이다. 자기 확신이 지나쳐 독불장군이 돼버린 할,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길 원했던

감성적인 로봇 데이비드(). 만일 현실이라면, 틀림없이 MIT AI랩이 그들의 자궁과 둥지가 될 것이다. 이처럼 SF영화의

판타지와 테크놀로지의 리얼리티 사이에는 그리 큰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은 서로 영감을 주며 함께 가는 사이라는 것을 이 이벤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의 오프닝을 공개한 순간이었다. 화면 가득 출렁이는 바다 위로 벤 킹슬리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오프닝신은 그러나 현장의 프로젝션 문제로 대부분 잘려나가고, 막바로 윌리엄 허트의 테크놀로지 강의실 장면이 이어졌다. 윌리엄 허트가

수업중에 한 여학생에게 다가가, 바늘로 그녀의 손을 깊숙이 찌른다. 여학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명을 지르지만, 피는 한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다음 순간 그녀의 정체가 드러난다. 윌리엄 허트가 그녀의 입천장께 무언가를 누르자 얼굴이 무표정해지는가 싶더니 얼굴가죽이 벗겨져 나와 갈라지며

‘페이스 오프’된다. 얼굴 뒤로 드러나는 건 금속 골격과 컴퓨터 칩이다. 여자는 인공지능에 감각까지 갖춘 로봇이었던 것이다. 윌리엄 허트의

강의는 이어진다. 그는 이 로봇에는 감정이 없다면서 사랑할 수 있는 로봇, 소년 로봇을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그러자 한 학생이 미심쩍은 눈길로

묻는다. “감정이 있고 사랑을 아는 로봇이 있다면, 인간은 그 감정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나요?” 윌리엄 허트는 멈칫하다가, 천지창조의 순간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태초에, 신도 아담이 그를 섬기고 사랑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나?”

10분이 아니라 5분이었고 그럴싸한 볼거리도 없었다. 짧은 시사가 끝나자, ‘보여주기’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니냐는 불만들이 터져나왔다. 굳이

위안을 찾자면,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촬영 때문에 이벤트에 참석하지 못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화상 메시지 내용으로 미뤄 짐작해볼

때, 이 장면의 의미가 꽤 크다는 것 정도다. 이야기의 서막일 뿐 아니라 영화의 화두가 던져진 순간이었다고 할까.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기계들이 인간사회에 편입하려 할 때 인간들은 공포와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이라면 창조주인 인간들은

어떤 태도와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어떤 책임을 느껴야 하는지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스필버그는 그것이 감성적인 로봇이 존재할 법한 미래를

내다본 큐브릭의 문제의식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석한 프로듀서 캐슬린 케네디도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인간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그런 로봇들을 과연 사랑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거들었다. 하지만 관객이 제작진의 의도대로

영화를 감상하지는 않았다. MIT의 학생인 듯한 한 관객은 “<터미네이터> <바이센티니얼맨> 등 이런 유의 영화를 수없이

봐왔다. 왜 같은 스토리를 재탕하려고만 하느냐”며, 이 영화에 독창성이 없다는 공격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질문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는 프로듀서의 한 마디에 진압당하긴 했지만.

로 봇 을 알 아 야 인 간 이 보 인 다.

‘인간이 기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큐브릭과 스필버그만큼 고민한 이들이 또 있었다. MIT AI랩 사람들이다. 지능적인 컴퓨터를 만들고자

했던 이들은 인공지능 기계와 로봇의 개발뿐 아니라, 인간의 언어와 행동, 학습능력 등과 연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시사와 관련

인터뷰가 끝난 뒤, 해외 기자단은 AI랩에 초대돼 기능별, 부분별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각각의 연구실을 견학하는 간단한 투어를 했다. 일어서고

걷는 로봇을 개발하는 렉 팩토리, 움직이거나 소리내는 대상에 반응하는 로봇이 있는 토루소 섹션, 음성명령을 인식해 그대로 수행하는 컴퓨터의

방 인텔리전트 룸 등을 둘러봤다. 인기가 높아 ‘알현’하지 못한 로봇 중 하나가 키스멧이다. 키스멧은 함께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표정과

움직임이 달라지는 등 인간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된 아동 로봇으로, 의 주인공 데이비드와 가장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키스멧의 발명가 신시아 브리질은 인간에 가까운 로봇을 만드는 것은 인간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적인,

사교적인 로봇을 만들려 하는 것은 결코 오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비추는 기계를 만들고,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과 유사한 로봇을 통해 거꾸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인공지능 연구소장인 로드니 브룩스는 이번 이벤트를 영화와 과학의

경솔한 유착이나 과대선전으로 보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속단을 금해야 한다. 80년대 SF소설에서 언급된 인터넷을 허황된 것이라 비웃었지만,

오늘날 이것은 현실이 됐고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급파되고 있다.” 이들은 스필버그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 기계와 로봇이 인간사회

깊숙이 파고들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베 일 에 가 린 실 체, 개 봉 까 지 비 밀 에 부 쳐

장장 7시간에 걸친 이벤트를 통해, 인공지능 테크놀로지의 세계는 실감했으나 영화 의 실체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의

구체적인 스토리는 현재까지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온실효과로 빙하가 녹고 지구상 대부분의 지역이 물에 잠긴 먼 미래, 사랑의 감정까지 느낄

수 있는 인공지능 소년 로봇이 인간의 가정에 입양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그가 기계도 인간도 아닌, 소속불명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 정도가 공개된 내용의 전부다. 최근 예고편에 등장한 알쏭달쏭한 크레디트 ‘sentient machine therapist-Jeanine

Salla’(감정을 지닌 기계의 치료사-지닌 셀라)를 키워드로, 가상의 의문사 사건을 파헤치는 게임 형식의 인터넷 프로모션이 진행되고 있을

뿐, 배우와 스탭 누구도 어떤 경로로도 이 영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다. 6월29일 미국 개봉 직전까지 베일은 벗겨지지

않을 듯하다. 한국관객은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의 국내 개봉은 8월 말로 예정돼 있다.

보스턴=박은영 기자

인터뷰|할리

조엘 오스먼트 & 캐슬린 케네디

“누가 뭐래도 스필버그의 영화다”

프로듀서 캐슬린 케네디와 주연배우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참여한 공동 기자회견은 MIT AI랩에 소속된 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주제발표가 끝난

뒤, 약 20분간 진행됐다. 제법 큰 키에 회색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할리 조엘 오스먼트는 노련하고도 겸손한 태도로 똘똘한 답을 들려줘 좌중을

흐뭇하게 했다. 의자가 높아 다리를 주체못하고 안절부절하는 품새나, 마이크 가까이 대는 것을 잊어 프로듀서의 손을 바쁘게 하는 모습,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눈을 깜박일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소감도 깜찍했다. 그러나 스토리와 캐릭터의 구체적인 내용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는 것이 사실인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들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언급으로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할리, ‘감성을 지닌 로봇 치료사’ 지닌 셀라와 같이 일해본 경험은 어땠나.

(할리 조엘 오스먼트, 눈에 띄게 당황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프로듀서가 얼른 마이크를 잡는다) 지닌은 대단히 뛰어난 스탭이다. 하지만 그녀는

특수효과 파트라서 할리와 함께 일하지 않았다.

오스먼트 (이제야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장내에 폭소가 터진다) 지닌은 후반작업팀이라서 나와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람이라는 얘기는 익히 들었다. (장내 웃음)

MIT AI랩에서 영화를 소개하는 기분이 어떤지.

오스먼트 여기 전문가들과 달리 나는 테크놀로지는 잘 모른다. (수줍게 웃는다)

감정을 지닌 로봇이 탄생하고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건 혁명에 가까운 기술적인 발전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데이비드라는 캐릭터가

스토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와 발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미래사회의 로봇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경험, 특히 감정적인 경험을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케네디 오늘 이 자리에서

보니, 이 영화가 다루는 미래사회의 판타지와 MIT 인공지능 연구소의 오늘이 보여주는 리얼리티는 놀랍게도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오리지널리티가 얼마나 남아 있나. 그의 영향은 어떻게 작용했나.

케네디는

큐브릭이 10여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오래 숙성시킨 프로젝트다. 큐브릭은 이 작품을 위해 스토리보드와 트리트먼트를 남겼고, 스필버그가 그것을

물려받았다. 큐브릭은 어떤 형태의 시나리오도 남기지 않았으며 시나리오는 온전히 스필버그의 작품이다. 큐브릭과 스필버그, 두 사람은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고 그때 이미 그들의 취향과 개성, 재능과 감수성이 ‘융화’됐다고 볼 수 있다. 큐브릭은 생전에 이 프로젝트는 스필버그의

감수성에 더 가깝기 때문에 스필버그가 연출자로 더 적합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오스먼트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니까. 시나리오도 너무 새롭고 재밌었다. 전에

했던 작품들과 달라서 더욱 끌렸다. 스필버그를 포함한 뛰어난 스탭과 배우들이 참여한 독특한 스토리의 영화를 만나게 돼 무척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많이 배웠다.

케네디 나는 스필버그와

오랫동안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 이 영화는 성격상 나 <미지와의 조우>와 비교될 테지만, 와

스필버그는 특히 궁합이 잘 맞았다. 그의 세계관은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스필버그는 테크놀로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테크놀로지의 혜택과 긍정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다. 그런 그의 프로젝트는 매력적이다.

사람이 아닌 로봇을 연기했기 때문에 더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오스먼트 시나리오에 쓰여 있는 대로 연기한다기보다는 캐릭터 하나를 새로 창조하는

것 같았다. 캐릭터의 ‘육체’를 창조해냈다고 할까.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정의하는 일부터 해야 했고, 그 어떤 캐릭터와도

다른 존재였기 때문에 몸의 움직임 자체를 발전시키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기계에 가깝다가 사건이 전개되면서 점차 인간에 가까워지는

변화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아주 인간적이지도 않고 아주 기계적이지도 않은 지점에서 밸런스를 찾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인공지능의 테크놀로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작업방식이 달라지기도 했을 텐데.

케네디 스필버그와 나는

와 <쥬라기 공원> 등에서 첨단의 로보틱 기술을 선보여왔다. 스탭들은 그 로봇 메커니즘이 얼마나 세련되고 정교하냐에

따라 실질적인 감정을 싹틔우고 모종의 상호관계를 맺는다. 이 영화는 이처럼 기계와의 상호작용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느냐에 대한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들을 제시한다. 촬영장에서 이런 주제로 종종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런 분위기가 캐릭터들에도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융합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그런 문화 속에 있다.

오스먼트 맞는 말이다. 세트에서 여러 가지 재미난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세트에

나갈 때마다 그런 호기심을 하나둘 해결할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MIT의 AI랩이 이 영화의 제작과정에 얼마나 기여를 했나.

케네디 우리는 여기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리서치에 대한 자료와 논의들을 참고했고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시나리오 단계나 프로덕션 단계에서 어떤 자문을 구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스필버그 혼자 창조한 스토리다.

<식스센스>와 비교하면 어떤 연기가 더 어렵나. 혹은 더 재밌나.

오스먼트 작품들을 서로 비교할 수는 없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어떤 한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더 즐겁거나 어렵거나 하진 않다. (장내, 대견하다는 듯한 웃음들) 다만 나는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좋은 작품들을

만나고 좋은 스탭들과 작업했으니까. <식스센스>와 는 서로 너무 다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서로 연관돼

있다고 느끼는데 캐릭터를 이해하고 발전시킬 때 전작에서 배운 것들이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