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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와 함께] 고통을 이긴다는 것,드라마 <로즈마리>

KBS2TV 수·목 밤 9시55분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 서면 갑갑해진다. 자기 앞에 놓인 대상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안심하고 그것에서 벗어난다. 예컨대 갑자기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는다든가 치명적인 질병이 찾아온다든가 하는 일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다. 이때 우리는 분노하고 증오하고 절망한다.

<로즈마리>의 정연(유호정)에게도 죽음은 그렇게 다가온다. 성실하고 가정적인 남편 영도(김승우)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서 자신의 병과 죽음 그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죽을 줄만 알았던 로즈마리는 정연의 부엌 창가에서 살아났지만 정연의 몸은 언젠가는 무력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경수(배두나)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버려져 고아처럼 살아왔다.

우리는 늘 어느 한면만을 보고 다른 면이 그것과 대립되는 것이며 서로 배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대척점은 질투나 미움이며 정상(건강)은 비정상(질병)의 대척점이라고. 그래서 사랑과 건강 앞에서는 안심하고 즐거워하지만 질투나 질병 앞에서 짜증내고 절망한다.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정연에게 경수의 젊음과 건강은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외로이 버려진 과거를 가진 경수에게 정연이 누리는 가족적 안정감과 애정스런 남편은 그 자체로 소유욕의 대상일 수 있다(실제로 경수는 영도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양면성을 가진 애증의 논리로 볼 때 서로는 질투와 배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서로 그렇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지는 몫의 삶에도 호들갑스럽지 않다.

그저 그렇게 흔한 사랑과 이별의 대척적인 세팅을 기대하면서 TV를 보던 나는 이들이 극단적인 과거의 불행과 미래의 불확실함 앞에서도 전혀 엄살을 떨지 않는 모습에 조금씩 놀라게 되었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저주하거나 위암의 원인을 자기를 괴롭힌 누구에겐가로 돌리고 원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자기를 괴롭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 서본 사람은 안다. 끊임없이 그 일의 원인을 찾아 헤메고 증오할 핑계를 만들어간다.

경악스럽게도 경수는 그저 깊숙이 눌러두고 슬픔이나 분노가 넘쳐나서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눈을 약간 내리깔고 조용하고 빠르지 않은 억양으로 사건을 기술한다. 정연은 그런 경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고통을 가라앉힌다. 육신의 병이 진전되는 상태로 보면 정연은 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연은 경수를 만나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만남에 손을 내민다. 둘의 관계가 육신의 병을 이기는 또다른 해법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질병도 사랑도 단순한 가치 위에 올려놓고 재단할 수 없는 삶의 원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반된 것으로 표출되는 양면성을 동일한 기반 아래로 조용히 끌어들이고 있었다. 불행한 사건의 원인을 찾아 반대편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그렇게 경수의 불행했던 과거와 정연의 절망스러운 미래는 그들이 살고 있는 지금에서 만난다. 그들이 함께 만두를 빚는 곳에서, 생일상을 차려주고 축하노래를 불러주는 곳에서 나는 과거와 미래와 질병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배타심이 한곳에서 지극히 절제된 미학으로 용해되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과 무서움은 있을지언정 분노와 증오, 그리고 처절한 분출이 없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천연스럽게 질병과 사망과 고독을 털어 넣는다. 정연의 육신과 그녀가 보여주는 언행은 ‘로즈마리’처럼 언젠가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만 남겠지만 경수가 함께 지금 거기에서 대척점들을 용해시키며 그 ‘기억’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과거의 고통과 미래의 질병을 이기는, 요란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고집스럽지도 않은 그들의 재생방법인 것이다.素霞(소하)/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