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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낭만자객> 감독 윤제균 인터뷰

"민감한 소재를 건드리면서 관객과의 게임을 즐긴다"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설 때쯤 윤제균 감독은 “이렇게 진지한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몇번을 거듭 말했다. 뜻밖이었다. 굉장히 심오한 질문을 한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상대방이 불편할 수 있는 질문이 좀더 많았던 것 같은데. 그동안 왜 말을 아꼈냐고 되물었다. “(기자들이) 물어봐야 말을 하죠.” 이건 ‘윤제균표 코미디’와 윤제균 감독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어떤 것이냐를 보여주는 증언처럼 들렸다. <두사부일체> 350만명, <색즉시공> 420만명이란 연타석 홈런을 쳤지만 그 이유를 헤아려보기보단 ‘쌈마이 코미디’의 상업적 공략에 따른 우연한 성공쯤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낭만자객>에서도 그의 연출 색깔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욕하고, 때리고, 망가지는 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신파라고 해야 할 만큼 눈물과 슬픔의 장치를 후반에 배치하는 건 여전하다. 평단은 이들의 결합 방식을 쓰레기 취급하고 있고, 관객의 반응은 현재로선 미지수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독특한 뚝심과 개성이 엿보인다. 가장 잘 드러난 게 <색즉시공>이라면, 가장 혼란에 빠진 것이 <낭만자객>이다. <두사부일체>에서는 사립학교의 전횡과 폭력에 대해 고발하겠다는 진정성이 반가우면서도 교사의 권위와 아버지의 그것을 무조건 동일시하고 떠받드는 설교가 불편했다. 이번에는 효순과 미선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똥과 코딱지, 그리고 장갑차 사건…. 정작 자신은 코미디보다 <오아시스> <파이란> <반딧불의 묘> 같은 영화를 보는 게 더 좋다는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매년 연말 공략해온 게 “깨지더라도 할리우드 직배영화와 겨루고 싶어서”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특별히 그렇게 했다기보다 스케줄 요인이 크다. 늘 봄에 촬영을 시작하니까. 하지만 약간은 할리우드 대작이 많이 나오는 때가 12월이고 또 누구나 어렵다고 이야기하니까 반항심이 작용한 것도 있다. 두번을 하고 나니까 영화만 잘 만들면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두사부일체> 때 평단의 반응은 적대적이었다. <색즉시공>에서 약간 호의적으로 돌아서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최악인 것 같다. 평단의 반응이 좋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또 욕을 먹겠구나 생각은 했으나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한번도 영화를 만들고 좋은 평을 들은 것 같지 않다. <색즉시공> 때도 대다수가 쓰레기 같은 영화, 최악의 영화라고 했다. 평단도 만족할 만한 영화를 언젠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지금 내 영화는 관객을 중심에 놓은 상업영화로 포지셔닝을 하고 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많이 참고한다.

감독으로서 폼잡거나 점잔을 빼지 않는 성격이 영화에 그대로 반영되는 게 장점이라고 본다. 윤 감독이 말하는 ‘재밌는 상업영화’의 포지셔닝 전략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 올해 <씨네21>이 설문조사한 한국영화 파워 50에서 28위를 한 건 영화계도 그 전략의 유효성을 인정한 결과가 아닐까. 취사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어쩔 수 없는 성향에서 나온 것 같다. 관객이 웃는다, 행복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7천원이 아깝지 않다고 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말을 들으면 내가 행복하지 못하고 상처받는다. 그래서 상업적인 감독으로 처음부터 포지셔닝을 했다. 영화를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기만 하는 영화를 보고 나면 공허하고, 진지한 영화를 너무 진지하게만 접근하면 지루한데 그걸 접목시킬 수 없을까 생각했다.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가볍지 않은 주제를 재밌게 만드는 방식 말이다.

평단의 반응 다시 추락하나

그게 감독의 영화에 대한 가치인가. 그렇다. 임신, 낙태의 문제를 <폰>이나 <하얀방>처럼 호러로 포장할 수 있고, 진지한 멜로로 만들 수도 있다. 또 나처럼 쌈마이 섹스코미디라는 장르로 포장할 수 있는 거고. 보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할 때, 그것을 아주 고급스런 명품 포장지에 담아 전달할 수도 있고 그냥 신문지 둘둘 말아 앞에 던져놓고 갈 수도 있다. 스타일의 차이인데 중요한 건 선물 주는 사람의 마음이다. 앞의 경우가 더 크다고 볼 수는 없다. 받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한다. 내 살아온 환경이나 생각이 후자쪽이다.

포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두사부일체>는 사립학교의 문제점을 고발하려는 것에서, <색즉시공>은 임신, 낙태문제를 이야기하겠다며 출발했다. 조폭코미디나 섹스코미디는 일종의 포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낭만자객>은. 이번에 가장 어려웠던 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상업적 포장의 수위조절이다. 어느 정도 비중으로, 어느 정도의 깊이로 파고들어가느냐 하는. 반미주의자는 아니지만 효순과 미선이 사건이 너무 가슴 아팠다. 촛불시위도 갔고, 내 마음을 움직인 사건이어서 꼭 작품으로 다루고 싶었다. 이걸 상업적으로 포장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은 법이다. A4 100장 넘게 자료조사를 했고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다. SOFA 22조에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가 갈린다. 공무집행 때 벌어지는 사건의 경우 1차 수사권을 미군이 가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이게 공무집행이냐 아니냐 하는 판단을 전적으로 미군이 한다. 반면 일본에선 그걸 서로 협의해서 판단한다. 공무집행이냐 아니냐를 미군 자신이 결정하고 1차 수사권을 자기네가 하니까 무죄로 판결이 난 건데, 안타깝게도 이걸 영화 속에 다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전작들보다 훨씬 무거운 주제여서 더 힘들었다.

영화를 다 만든 상황에서 수위 조절이 어땠다고 보나. 최상은 아니지만 최선이었다고 본다. 더 깊게 파고드는 것도 상업적으로 문제가 있고, 수박 겉핥기로 지나가는 것도 성의가 없는 것이고.

하지만 현실적인 소재를 끌어오면서 감독 고유의 혹은 고통스런 시선이 담기지 않는다면, 소재주의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 않을까.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이번이 그런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같다.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 같다. 자기 함정에 빠지는 것 같은데,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라 상업영화, 오락영화, 흥행영화 감독이고자 하는 입장에서 상업성을 포기할 수가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기만 하는 게 사실 나도 더 만들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매년 한 작품씩 하는 것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니까 흥이 나서 그러는 거다. 민감한 소재를 건드리면서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게임을 하는 게 좋다.

이번에는 그 게임의 상대자를 너무 얕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절대로 얕본 건 아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색즉시공>만큼 ‘하이’하지 못하다는 말들을 하는데, 첫째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과 공간에서 상상에 의존해 만들다보니 어려움이 컸다. 두 번째는 출발 자체가 15살 관람가에 초점을 맞춘 거다. <색즉시공>은 18살 이상을 메인 타깃으로, 요즘 대학교 1, 2학년을 두고 만들어서 어지간히 하이로 가지 않으면서 웃음 코드를 맞출 수도, 감정을 끌어낼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엔 고등학생으로 맞췄다. 그래서 너무 ‘하이’하게 가면 안 되는 것으로 봤다.

15살로 놓은 건 소재와도 관련이 있나. 소재라기보다 상업적 고려가 더 많았다. 그래야 많은 분들이 더 많이 볼 수 있으니까. 으흠∼ 소재가 너무 민감하다는 것도 생각한 것 같다.

영화의 규모가 이전 두 작품보다 커졌다는 게 화면에 묻어난다. 컴퓨터그래픽도 많이 썼고 무협장면도 많다. 그쪽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드라마는 얽혀 있고, 디테일은 새롭지 않은 것 같다. 사실 CG가 그렇게 많이 안 들어가도 된다. 출발할 때 나름대로 사명감 갖고 시작했다. 6분 분량의 영혼 검법장면에 그렇게 많은 CG를 넣고 경비행기로 동강에서 여러 차례 항공촬영을 한 건 그래서다. 우리 영화가 드라마나 코미디 부문에선 아시아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테크놀로지 부분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도 홍콩과 일본을 앞서야 한국영화가 진정 아시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록버스터들이 무너질 때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신인감독이 그런 영화를 할 수도 없고, 작가주의 감독은 하지 않을 테고, 나 같은 경우 이미 두편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누가 투자도 해주니까 나라도 여기에 도전을 하고 싶었다. 이번에 보니까 CG 작업이 형편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다. 그만큼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였다. 난 영화를 찍을 때 세 가지를 고려한다. 재미와 감동, 그리고 새로운 볼거리. <두사부일체>나 <색즉시공>은 재미와 감동에선 관객에게 인정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약한 건 볼거리다. 영화 바깥에서 영화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걸 이번에 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 말렸었다. 프로듀서까지.

스펙터클을 위한 시도는 이후 작품 구상을 염두에 둔 것인가. 물론이다. 어떤 확신을 얻었다. 할리우드의 80% 수준에 이르는 SF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테크놀로지와 코미디를 연결하는 작품을 언젠가 만들 거다.

진정성과 쌈마이 취향은 공존할 수 있나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기만 하는 영화가 더 만들기 쉽다고 했는데, 관객은 이럴 때 웃는다는 확신 같은 게 있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데, 나름대로 내 공식이 있다. <두사부일체>나 <색즉시공>까지 빗나가지 않았는데 이런 거다. 코미디 하나만 놓고 보면 하이 코미디와 중간, 그리고 로 코미디의 세 단계가 있다. 하이는 상황코미디다. 배우들이 코믹 연기를 하지 않아도 상황 때문에 웃긴다. <색즉시공>에서 기숙사 개방 장면이 그렇다. 중간 단계는 대사로 웃기는 것이고, 로는 몸으로 웃기는 거다. 한 영화에서 이것이 계속 로테이션돼야 한다. 한 가지 방식이 지속되면 관객이 지루해한다. 이전 영화들에선 상황으로 웃기다가 대사로, 그 다음에는 몸으로 웃기는 식으로 나름대로 계산을 해서 반복했다.

<낭만자객>에선. 하이한 코미디가 많이 없고, 대사도 하이한 것보다는 로한 게 많다. 반면 몸으로 웃기는 거, 먹는 것이나 맞는 것 같은 게 많다. 그래서 코미디로만 보면 <색즉시공>보다 약하다는 말이 나올 거다.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에서 일부러 자신만의 계보도를 그려가고 싶은 건가. 윤제균표 코미디라고 말하는 것 말인가? 하다보니 그런 말을 듣게 된 것 같다. 다만 난 말하고 싶은 걸 코미디로 만들었을 뿐이다. <두사부일체>를 만들 때, 코미디를 만들면서 관객을 울리고 감동을 주려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코미디만 하라고.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다. 내 목적이 뭔데, 목적을 버리고 수단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라고? 그래서 안 하겠다고 하고 다른 감독을 찾으라고 했었다. 도전의식이랄까, 난 99분 웃기다가도 마지막 1분에 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안 된다는 거였다. 사실 할리우드나 홍콩의 코미디에서도 사회비판은 해도 눈물을 끄집어내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남들 다 안 된다고 하니까 더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좀 그랬다. 일종의 반항심이랄까.

어떤 종류의 눈물, 감동을 원하는 건가. 이심전심이랄까. 관객과 감독이 막 게임을 하다가 그 끝에는 감독이 이 이야기를 하려고 나와 게임을 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 내가 느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

<색즉시공> 때 감독판이 있었다고 했다. 덜 웃기고 더 슬픈. 예술하냐며 2시간 동안 작살이 났고 집에 가서 울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감독 원하는 대로 한 건가. 그때 감독 버전이 더 야한 게 아니라 더 슬픈 거였다. 이번에도 슬픈 부분을 좀 들어냈다.

감독의 선택으로. 그렇다. 내가 감정 절제를 잘 못한다. 눈물도 많고 감수성이 굉장히 예민하다. 처음에 막 빠져서 찍다보면 스스로 조절이 안 된다. 그래서 배우든 프로듀서든 누구나 객관적으로 말하고 싶은 걸 다 내놓으라고 했다. 1차 편집 때 감정 과잉이 심해 그걸 덜어냈는데 그래도 과잉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좀더 걸러냈다.

15살을 겨냥하고 만들었는데 18살 관람가가 나왔으니 아쉬운 부분이 많겠다. 애초 18살을 겨냥하고 만들었으면 영화가 많이 달라졌을까. 그렇다. 너무 억울하다. 처음부터 18살을 겨냥하고 만들었으면 이렇게 찍지 않았다. 이렇게 로하게 가지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앞으로는 아예 18살을 겨냥하고 갈 수도 있겠다.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웃음) 배우도 그렇고 주변에서 내 취향은 18살이라고 예전부터 그랬다. 이번에 역겹다고 하는 장면도 나는 재밌다며 찍은 건데, 아무래도 내 정서는 보통과 좀 다른 것 같다.

<천녀유혼>과 <사무라이 픽션>을 보고 “얼빵하기 짝이 없는 자객들이 처녀 귀신들의 한을 풀어주면서 겪는 좌충우돌”을 가져왔다고 했다. 얼빵한 남자 캐릭터에 줄곧 애정을 보이는 까닭은. 완벽한 인간보다 약간 모자란 인간적 캐릭터에 애정이 많다. 완벽한 인간에게는 내 스스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망가졌다고 그러는데 오히려 멋있지 않나.

경제학과를 나왔고, 광고회사에 있었다는 등의 이력은 많이 소개가 됐지만 대중문화를 어떻게 향유하면서 자기만의 감성을 키웠는지는 별로 얘기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성장 과정과 천성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대학교 2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이전과 이후로 내 가치관이 달라졌다. 그 이전에는 집안도 잘살았고, 굉장히 거만하고 건방지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절대적 존재였다. 아버지가 굉장히 잘난 분인데 그때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고 못나야 얼마나 못나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컨대 지금은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배우하고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 20대는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친구집에 얹혀살았고. <두사부일체> 만들 때까지 별로 행복한 느낌없이 산 것 같다.

영화의 진정성과 쌈마이 취향은 공존할 수 있나. 영화의 진정성이 문제가 아니라 감독의 진정성이 문제일 거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지만 진심은 상대방이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영화를 정통으로 공부한 게 아니어서 많이 부족하겠지만 난 영화의 진정성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나의 진정성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두 작품이 300만, 400만명을 넘었다면 감독의 진심을 관객이 알아줬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면 평단이 문제인 것일까. 그런 건 아니겠지. 내 입장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을 놓고 내 작품과 비교하면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거다. 그냥 두 가지 기준을 놓고 봐주면 어떨까. 오락영화와 상업영화라는 기준으로. 쌈마이영화는 좀더 다른 시각에서 분석해주면 어떨까. 필요악도 있는데, 사라져야 할 악도 아닌데.

마지막으로 다시 묻고 싶다. 왜 울음과 슬픔이 주는 감동에 집착하는가. 장르가 목적이어서 장르의 완성도를 좀더 높이고자 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나는 그렇지 않다. 내 영화에서 목적을 배제해버리면 웃음만 남는다. 그건 싫다. 남들은 오버다, 싫다고 해도 나에겐 소중한 목적이 있다. 그걸 진실되게 전하고 싶다. 목적이 사라져버리면 영화를 할 이유가 없다. 꼭 사회비판적이나 그런 게 아니더라도. 웃음 속에 내 진심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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