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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제스처를 유희의 동력으로, <올드보이>

건달, <올드보이>의 정치학에 주목하다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고 한다. 정글에서 가장 맞장을 잘 뜬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표준화된 정글의 서열은 스포츠 상황을 전제하고 관망하는 사람들의 규정이다. 동물의 실생활은 다르다. 최종적인 승부는 언제나 정치적 상황이 개입한다. 예컨대, 이런 경우가 가능하다. 출산 중인 암사자를 기습한 하이에나, 졸고 있는 치타의 눈에 뿔을 꽂아버린 오렉스 영양, 밀렵꾼에게 훔친 손도끼로 표범의 뒤통수를 내리친 오랑우탄, 동네 악어 형들의 아지트를 밀렵꾼에게 일러바친 새끼 하마, 독이 한창 올랐을 때 구렁이를 찾아가 ‘나 잡아봐라’고 약올리는 독두꺼비…. 정글도 인간세계처럼 기습전, 첩보전, 화력전, 자살테러, 외교전 기타 등등의 전략이 개입하지 말란 법이 없다.

물론 이건 농담이다. 개연성이 희박하다. 실제 동물세계의 전략은 ‘떼짓기’ 한 가지밖에 없다. 떼는 두 종류가 있다. 조폭처럼 상습적으로 떼를 지어 있는 경우, 그리고 폭도들처럼 욱해서 떼를 짓는 경우다. 전자보다 후자가 무서운 건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맹목적인 울분이 있기 때문이다. 상습적인 개떼보다 욱한 메뚜기나 개미가 더 살벌한 법이다. 상상해보라. 작다고 설움받다가 간만에 휘두르는 그 맛이 어떨지! 거기다 떼는 폭력을 동원하는 경쟁심을 유발하고 결과에 대한 죄의식은 옆으로 슬쩍 밀어버릴 수 있는 창이자 방패가 아니던가. 그러니, 정글의 왕은 사자가 아니라 개미떼다. 사자가 개미떼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공격할 몸통이 없는데다 개미에게 당하면 쪽팔려 어디 가서 말도 못하기 때문이다. 또, 평소 우습게 알던 대상에게 야금야금 먹혀가면서도 아무런 대책없는 자신을 응시하며 자책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패배가 예정돼 있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장렬한 전사도 허용되지 않는 적! 개미떼는 얼마나 무서운 적인가!

<올드보이> 이우진은 이 개미떼와 싸운다. 그는 새끼 사자 시절 누이와의 근친상간이라는, 인류문명을 한 사위에 부정하는 거대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런데, 방정맞은 개미 한 마리가 이 광경을 보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무수한 개미들의 입에서 나온 풍문의 모래알들은 침과 섞여 거대한 콘크리트 댐을 형성했고, 마침내 누이를 삼켜버렸다. 그는 복수를 결심한다. 하지만, 개미떼를 무슨 수로? 일단 개미떼를 해산시켜야 한다. 그러면, 각각의 개미들에게 어떻게 고통을 주지? 그리고 누이와 나의 선의는 또 어떻게 설명하지? 그는 함무라비 법전의 판례집 ‘따따블로 보복하는 함무라비’를 참조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이 문제를 하나의 칩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근친상간 백배 즐기기’라는 게임을 개발한다.

이 게임에 발을 들여놓으면 너무너무 사랑에 굶주린 상태에서 딸과 근친상간을 해야 하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알면서도 못 벗어나게 돼서, 쾌락과 죄의식의 감옥에서 영원히 감금되는 탄탈로스가 된다. 그는 쾌재를 부른다. 그래, 마지막에는 반드시, 나를 고통에 빠트린 바로 그 관념, 개미떼를 떼로 엮어주는 그 관념, 근친상간 금기 때문에 스스로 감금의 고통을 받게 하는 거다. 떼를 지은 대가가 어떤 건지 보여주는 거다. 스스로 이를 뽑아버리고 혀를 잘라도, 설마 뇌세포를 죽일 순 없겠지!

나중에 프로그램이 완료되고 올드보이는 깨닫는다. 자신이 갈 곳이 없음을, 자신이 없애버린 개미떼가 고향임을.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자신이 개미임을 알고 있었고, 프로그램의 마지막 파일은 권총자살 장면으로 예정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한 일은 자신을 포함한 개미떼의 절멸이다. 이 영화에서 살아 있는 인간은 이우진밖에 없는 듯하다. 나머지는 그의 머릿속 판타지다. 그래서 영화를 인간조건에 깊은 혐오감을 느낀 사람의 현란한 자학의 기록으로 봤다.

아무리 급진적인 아나키도 근친상간 금기를 건드리진 않는다. 그건 주먹으로 댐을 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근친상간 금기의 거론은 처음부터 손을 깨기 위한 자학이거나, 손을 깨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진정성의 현시에 조준돼 있을 공산이 크며, 결과는 댐만 더 공고해진다. 불가능이 예정된 대상에 도전하는 급진성은 보수성으로 귀착된다. 왜냐하면 그건 처음부터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대중영화로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고뇌의 제스처를 유희의 동력으로 돌려놓고, 급진적 아나키의 관심에서 국가주의자의 이익을 찾아내는 화법. A형을 AB형이라고 말하는 화법 말이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