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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한국영화 결산 [5] - 올해의 영화인 BEST 4
문석 2003-12-26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다올해의 감독·프로듀서·촬영감독·시나리오

올해의 감독 장준환 - 괴팍한 상상력의 제왕

“상상력의 독창성만 따진다면 최근 몇년 동안 한국영화에서는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만큼 독보적인 존재를 아직 보지 못했다. 어쩌면 한국 영화사의 가장 개성적인 감독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이가 바로 우리 시대에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은 흥분감마저 느끼게 한다.”(홍성남)

이제 첫 영화를 찍었을 뿐인데, 어떤 이는 장준환 감독을 김기영 감독에 비교하기도 한다. 괴이한 상상력과 B급 감수성으로 충만한 <지구를 지켜라!>가 그동안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어떤 ‘반역적인’ 기운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리라. 전국 6만8천여명이라는 초라한 흥행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내외에서 뜨거운 지지를 받은 점 또한 그러한 감성을 높이 산 탓일 것. “괴팍하고 귀여운 몽상가”(박평식), “장르적 기본기가 튼실하면서도 B급 영화적 상상력이 충만한 진정한 할리우드 키드의 탄생”(심영섭), “영화적으로 사유하고 영화적으로 꿈꾸는 ‘상상력의 제왕’”(황진미) 등의 칭찬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가 올해 최고의 신인감독이라는 사실은 이미 대종상, 부산영평상, 서울영평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춘사영화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 등에서 신인감독상을 휩쓸었다는 데서 쉽게 증명이 됐다. 하지만 “단편을 통해 ‘약속’했던 바를, 장편을 통해 지켜낸 현 시기 유일한 데뷔감독”(변성찬)이라는 점에서 그는 신인이지만, 신인에 머물지 않았다. <지구를 지켜라!>는 단편 의 충격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이를 좀더 확장, 발전시켜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자신이 생각한 바를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그는 평단의 높은 지지를 얻어냈다. “자기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들 듯이 철저하게 자기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기어이 드러내 보인다”(정성일)는 평가는 이를 지적한 것. 결국, <지구를 지켜라!>는 ‘실수’나 ‘우연’으로 빚어진 게 아니라 감독의 일관된 ‘영화노선’에서 기인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장준환 감독의 속이 편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흥행에 초연하려 한들, 그래도 데뷔작에 10만명도 안 들었다는 사실에 충격받지 않을 감독은 없는 법. “사실, 섭섭했던 건 사실이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고 고민도 했다. 그래도 이 영화를 사랑해준 적지만 소중한 관객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다. 물론 부담도 생긴 게 사실이다.” 특히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열혈 회원의 지지는 그에게 큰힘을 줬다. 숱한 트로피보다 자신의 영화를 사랑해준 소수의 관객을 통해 그는 용기를 얻은 것이다. 다만, “대단한 연기를 펼친 신하균에게도 시선이 좀 갔으면 하는 안타까움”은 여전히 그에게 남은 멍에 같은 것이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주인공 병구의 전사(前史)라 할 만한 내용으로 정재일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뒤, 현재 싸이더스에서 신작을 준비하기 시작한 장준환 감독은 “아직 어떤 작품을 할지 결정된 바는 없지만, 흥행도 좀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올해의 프로듀서 차승재 - ‘웰메이드’ 작가영화를 향한 뚝심

“올해의 교훈? 하던 대로 해야 한다는 거다.” <살인의 추억> 등으로 건재함을 과시한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코미디 바람 등에 편승하지 않고 그동안처럼 ‘웰메이드영화’를 뚝심있게 밀어붙인 게 올해의 성과로 남았다고 자평한다. 올해는 차승재 대표가 충무로에 들어온 이래 최고의 해임에 틀림없다. 최고 흥행작인 <살인의 추억>을 만들었고, 문제작인 <지구를 지켜라!>와 <싱글즈>를 차례로 발표했으며, <말죽거리 잔혹사> <범죄의 재구성> <늑대의 유혹> 등을 활기차게 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 트로피는 엄청 늘었지만 상금없는 상이 워낙 많아 술값만 늘었다”고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는 “분위기는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갈 길은 아직도 험한 셈”이라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올해의 촬영감독 김형구 - 시대적 공기의 시각적 포착

좋은 촬영감독은 프레임 안을 통해 그 바깥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의 김형구 촬영감독이 바로 그런 경우. 그는 단순히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답답한 시대적 공기의 시각적 포착에 성공했다”(홍성남). “5공이라는 암흑기를 다루는 탓에 컬러를 빼는 것을 고민했고, 그래서 듀플리케이션 네거티브를 만들 때 블리치 바이패스 기법을 시도했다.” 또 그는 봉준호 감독과 함께 ‘비오는 장면은 흐린 날에만 찍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생을 마다지 않았고, 70여 군데를 돌며 로케이션을 하는 와중에도 영상원 강의를 빼먹지 않았다. 현재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내년엔 <역도산>을 재현하는 데 뛰어들 예정이다.

올해의 시나리오 봉준호, 심성보 <살인의 추억>

탁월하고, 탁월하다

“그 시나리오 죽이더라.” 영화를 찍기 전부터 충무로에 자자했던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에 관한 소문은 영화를 통해 그 뛰어남이 입증됐다. 봉준호 감독이 대부분을 구상하고 스크립터이기도 한 심성보씨가 도움을 준 이 시나리오는 탁월한 캐릭터 묘사와 실감나는 대사가 문학적인 가치마저도 갖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시나리오는 초판 5천부가 다 팔리고 재판을 찍었을 정도다. 봉준호 감독은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시대적 무능과 한계라는 답이 나오기까지 몇달이 걸렸다. 그뒤론 송강호, 서태윤, 조용구 등 캐릭터가 명확해졌다”고 말한다. 현재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와 3번째 작품을 준비 중인 그는 또다시 시나리오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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