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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 <러브 액츄얼리>

건달, <러브 액츄얼리>를 보고 상투적인 남녀간의 사랑에 썰렁해하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연적으로 경쟁하는 삼각관계는 흔히 볼 수 있는 구도다. 여기서 가장 상투적인 양상은 두 남자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선명성 경쟁을 하는 것이고, 여자는 그 사랑의 순도로 한 남자를 낙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구도에 매우 익숙하다. 사랑은 결국 남녀간의 독점적 소유로 귀결돼야 한다는 일부일처제의 도그마를 깊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각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보면 당황한다.

<글루미 썬데이>는 중년 남자와 그의 젊은 아내, 그리고 아내의 애인과의 삼각관계를 경쟁이 아니라 평등분배로 해결한다. 남자 둘이서 여자를 절반씩 소유해서, 격일로 여자와 동침하는 것. 이 제안을 한 것은 젊은 피아노 연주자와 사랑에 빠진 젊은 아내를 둔 중년 남자다. 여자도 이 제안을 반기지만, 그녀의 애인은 막상 여자가 남편과 지내는 날을 견디지 못한다. 이 남자의 불평을 사랑의 순도에 대한 증거로 여기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하지만, 그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버릴 준비가 전혀 안 된 사람이다. 이 남자보다 진심으로 여자를 사랑하는 건 남편이다. 그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절반이라도 갖는 게 낫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했다고 말한다.

사랑을 관계의 순도로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유는 극히 미심쩍다. 하지만, 어떤 절실함은 낯선 방법론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 남자는 상실에 대한 공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변칙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면 보내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은 그럴듯한데, 사실 그 말의 사용 맥락은 언제나 현재 누리는 자가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위해 패자에게 강권하는 천박한 결과주의의 적반하장에 다름 아니다. 이 남자의 방법론이 미심쩍은 것도 너무나 오랫동안 사랑을 소유의 도그마 안에서, 그것도 승자의 위치에 감정이입해서 상상해온 습관 때문일 게다.

로맨틱코미디는 이 습관에 의지해서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영화처럼 멋있게 만나 연애하다가 결혼에 골인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꿈은 일종의 맹목적 습관이다. 그 꿈이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무의식적으로 그 꿈에 젖곤 한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 그래, 그건 일종의 불치병과 같은 거다. 나는 그 이유가 두 가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하나는 수많은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사랑에 대한 욕망이다. 나머지 하나는 가장 적은 투자로 가장 많은 사랑을 갖고 싶은 효율에 대한 집착이다. 멋있게 만나 연애하고 결혼을 통해 사랑을 유지한다는 내러티브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당신이 절실히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드립니다”라는 일종의 유혹이다. 우리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사랑이 스러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전함 속에서 견뎌야 할 것인가. 사랑이 편재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을 모두 갖기 위해 얼마나 분주히 마음을 이리저리 돌려야 할 것인가. 이 사실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일용할 일인분의 사랑을 꼭꼭 눌러 하나의 도시락에 담았다는 로맨틱코미디의 전언에 귀를 내주는 게 낫다. 그러니, 로맨틱코미디가 불패의 장르로 장수하는 비결은 ‘로맨틱’을 ‘이코노믹’으로 조직한 데 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사랑이란 물건에 대한 탐욕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린다.

<러브 액츄얼리>의 감독도 이런 고민을 한 듯하다. <온 누리에 사랑을>이라는 노래가 <온 누리에 크리스마스를>이란 노래로 리메이크되는 첫 장면은 이 영화의 정체성을 홍보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맨틱코미디 장르가 다루어온 젊은 남녀의 ‘효율적 사랑’이 아니라 세상에 편재하는 보통 사람들의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거, 크리스마스에 탄생한 그분이 주장한 박애를 참조했다는 거, 그러니 관객 여러분은 멀리 있는 사랑을 좇지 말고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가까이 있는 사랑을 발견하라는 거. 영화는 이런 말을 듣고도 마음이 훈훈해지지 않을 수 있냐고 자신만만하게 묻는다. 글쎄? 나는 마음이 훈훈하다 말았다. 이유는 이 영화의 모든 사랑은 늙은 가수 하나만을 빼면 모두 상투적인 남녀간의 사랑이다. 심지어, 피도 안 마른 초등학생까지 이 대열에 서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편재하는 사랑, 즉 박애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편재하는 효율적 사랑에 대한 영화’, 즉 편애에 대한 영화이다. 그걸 박애로 둘러치는 화술이 기막히다. 하긴 크리스마스 하루 날 잡아 기도한다고 뭐 그리 로맨틱코미디가 달라지겠는가.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