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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쭉이 뚱뚱이’여, 다시한번
2001-05-30

한국영화회고록 - 심우섭 편 <마지막 회> 함께 일한 배우들을 추억하다

예나 지금이나 배우의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변함없으나, 60∼70년대 영화배우들은 적어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은 덜했을

것이다. 전문 목소리 연기자인 ‘성우’가 신성일이든, 신영균이든 남궁원이든 그저 같은 목소리로 대변해주었기 때문이다. 여배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목소리만 듣고 있자면 주인공이 엄앵란인지 윤정희인지 구분이 안 갔다. 배우 출연료보다 성우에게 들이는 비용이 더 클 때였다. 현재 TV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인자한 할머니로 나오는 정애란과 <하녀의 고백>(1963)을 찍을 때였다. <하녀의 고?gt;에서는

배우 전원이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연기를 했다. 성우가 목소리를 대신해주던 것에 익숙해 있던 배우들은 본인이 직접 녹음해야 한다는 방침에 적잖은

부담감을 표시했다. 정애란 역시도 본인 녹음이라는 말에 결정을 망설이는 눈치더니 막상 시나리오를 받아들자 얼굴이 환해진다. 그녀의 역은 다름

아닌 벙어리 처녀. 대본에 나와 있는 대사란 그저 ‘어어어’뿐이었으니 얼굴이 환해질 만도 했다. 지금도 그녀를 만나 그 당시 얘기를 꺼낼라

치면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히곤 한다. 배우의 목소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영화가 늘면서 배우협회에서는 배우들에게 발성 훈련과 녹음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당시 여배우 가운데 지금까지도 TV드라마에서 활약하는 박애숙, 유명순, 김경란 등이 발성 훈련의 톡톡한 수혜자들이다.

노역(老役)이나마 방송을 통해 건재함을 자랑하는 그들이야말로 혹독한 생존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선 자들이다. 배우 양훈(1921∼1998)은

나와는 영화 안팎으로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코미디만 하던 그가 배우로 이름을 알린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5父子)>(1958)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이듬해 김화랑 감독의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1959)에서 ‘뚱뚱이’ 역으로 대번에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표정이 압권이었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청춘 십이열차>(1962)에서였다.

그로부터 <귀하신 몸>(1966), <남자 미용사>(1968), <남자와 기생>(1969)을 거쳐 <팔도

주방장>(1987)에 이르게 된다. <팔도 주방장>에서 양훈의 기용은 사실 조금 특별했다. 그동안 내내 조연자리에만 앉힌 것이

마음에 걸렸달까. 영화의 기획단계에서 나는 이미 그의 주연 기용을 굳힌 상태였다. 꼭 주연을 못 시킨 탓은 아니었다. 이미 그전에 나는 양훈에게

큰 마음의 빚이 있었다. 1969년 빚보증으로 거지 신세가 된 내게 여러 영화인의 도움이 있었음은 일찍이 고백한 바 있다. 도금봉과 김희갑의

도움이 있기 전, 제일 먼저 달려와 자신의 사당동 집에 함께 기거할 것을 제안한 이가 양훈이었다. 당시 딸아이의 학교가 남산인지라 등교문제가

걸려 선뜻 응하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고마움은 고스란히 마음의 빚이 되었다. 그를 주연으로 한 <팔도 주방장>은 우연찮게도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으나 다행히 마음속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마임 배우 김동수와 짝을 이뤄 ‘홀쭉이 뚱뚱이’ 신화를 재연한다. 덩치가 큰 양훈과 몸집이 약고 날렵한 김동수의 콤비는 예상보다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김동수를 만난 건 작곡가 정민섭에게 <곡예사의 첫사랑>이란 곡을 받아 노래를 부르던 박경애의 무대에서였다.

그녀 뒤에서 사랑에 빠진 피에로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던 김동수의 모습은 나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마침내 영화에 출연시키기로 한 것이다.

극 중 김동수의 역할은 스승 양훈을 따라다니는 제자 역이었으며 첫 연기치곤 매우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얼마 전 대종상 시상식을 지켜보다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다름 아닌 배우 신영균이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건강한 얼굴은 그와의 빛바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69년 <한

목숨 다바쳐>에 그를 기용하려다 감독협회의 제재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는 출연중이던 영화의 감독과 대립을 일으킨 것이 문제가 되어

감독협회로부터 기용거부을 당하고 있었다. 그 파장은 자못 심각해 자칫 배우로서의 생명을 잃을 판이었다. 배우란 모름지기 감독이라는 작가가 선택하는

자료이자 소재인데, 그러한 소재를 잃는다면 작가의 생명 역시 끊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나는 설득작업에 들어갔고 결국 보름 만에 그에

대한 제재는 풀어진다. 그는 이후 별 문제없이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나갔고 그 와중에 숱한 대종상의 부름을 받기도 한다. 오랜 지기의 얼굴을

마주 대하니 바쁘게 지나온 지난날의 회한이 더욱 깊어진다. 이 글도 이젠 마쳐야 할 시간이 왔으니 그저 하나님과 아내께 감사하다는 말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구술 심우섭|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 <운수대통> 등

연출정리 심지현|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