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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은 칼보다 비열하다, <라스트 사무라이>

건달,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고 사무라이의 미학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데 주윤발이 사용한 권총과 <라스트 사무라이>의 칼 중 하나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길이 1cm 남짓의 45구경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0분의 1초. 그렇다면, 일본 최대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의 칼이 목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제 아무리 날랜 검객도 총알을 앞지를 순 없다. 2004년 서울의 시민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아마도 열에 아홉은 권총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상대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자비심의 발로로.

그런데, 사무라이는 이 경우 칼을 선택한다. 그건, 상대에게 이왕이면 고통을 주기 위한 잔혹 취미 때문은 아니다. 사무라이가 상대에게 할복의 기회를 주고 뒤에서 목을 쳐주는 것은 패배의 불명예를 안은 적이 명예롭게 죽음을 선택하는 기회를 주고, 거기에 따르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다. 그런데, 이게 총을 선택한 사람들의 눈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 잔혹함으로 보인다. 총과 칼의 시각은 이렇게 다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사무라이의 미학을 이렇게 상상해보자. 전투가 직업이고 선택할 수 있는 도구가 칼밖에 없는 시대, 사무라이는 누군가를 베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살생을 피할 순 없다. 칼은 적을 벨 때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살의 느낌과 칼을 닦을 때 코끝에 와닿는 선혈의 비린내를 피할 수 없게 한다. 거듭 살생을 요구하고 살생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삶의 조건 속에서 사무라이는 살생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피해갈 수 없다. 사무라이는 이 지점에서야 자신이 지킬 수 있는 도덕성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는 살생의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무력한 정직함밖에 없다. 이 절박한 조건 속에서 칼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기억해야 하는 의무감은 칼날처럼 가팔라져서 칼과 자신의 육체를 동일시하는 길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사무라이에게 칼은 몸의 일부이며, 살생의 역사를 증언하는 의인화된 존재로 투영된다. 칼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배신하는 걸 의미한다. 사무라이의 칼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과 죄의식을 간직한 몸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기 자신의 배를 향하도록 예정돼 있다. 내가 당신을 죽인 것은 무구한 전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무라이는 전투에서 패배하는 순간 할복을 감행함으로써 정신의 부채를 청산한다. 그러니, 칼은 사무라이가 죽은 자와 소통하는 길이다.

사무라이영화의 미학은 가장 피학적인 태도에서 가장 가학적인 형상을 끌어낸다. 그러니, 결과적인 효용의 총량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총의 미학으로 보면 사무라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잔혹 취향으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의 눈에는 총이 더 비열하고 잔인하다. 총은 등 뒤에서 쏠 수도 있고 빌딩 위에 숨어서 망원경을 달고 쏠 수도 있다. 또 벌컨포처럼 방아쇠 하나로 수백발의 총알을 불특정 다수를 향해 퍼부을 수도 있다. 내가 죽인 자가 누군지 총은 외면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은 살생의 행위에 연루됐다는 감각을 지워버린다. 누구에게나 연루의 기억을 지우고 싶게 만드는 조건, 이 조건은 그 자체로 비열함을 충동질한다.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원자폭탄의 별명을 이렇게 명명하면 그 물건이 귀여워지는가. 원폭의 투하는 전쟁을 조기 종결시켜 더 많은 희생자를 줄였다는 논리로 정당화됐다. 결과적인 효용의 총량으로 살생을 정당화한 이 논리는 그 어떤 칼날보다 잔인한 총의 교리이다)를 투하한 B-29 조종사는 버튼의 반발력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히로시마의 희생자는 그 누구의 죄의식 속에서도 기억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멸된다.

총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벌려놓는다. 그 사정거리가 멀수록 인간은 우아하게 비열해질 수 있다. 선혈이 어여쁜 화장으로 대체되고 둔탁한 도덕적 행위는 날렵한 도덕의 포즈로 대체된다. 매개 과정에 삶의 직접성을 저당잡힌 시대! 사람들 사이에 사정거리가 있다. 내 칼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고 도망갈 넉넉한 여백이 있다.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 단지 애완견처럼 착한 척, 약한 척, 예쁜 척 포즈만 취하면 된다. 누가 굳이 살생의 기억을 떠올리려 할 것인가. 악당들은 진정 복 받은 시대에 살고 있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