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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불능의 도시에서 유랑하는 두 이방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 섬은 일본?!

아무리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해도 외국에 나간다는 건 여전히 지금도 포스트 바벨탑 시대임을 체감하는 일이 된다. 그 나라 말도 우리말도 무용지물이고 영어마저 각자의 버전대로 발음이 휘어지노라면, 소통 불능의 해프닝은 유쾌한 추억으로 남기 전에 웃지 못할 답답함과 서글픔으로 물들기 일쑤다. 이때만큼 모국인이라면 누구나 친구가 될 것 같은 순간도 없다. 그 혹은 그녀와는 통역도 필요없고 감정의 언어마저 같을 테니. 이른바 코드까지 맞다면, 눈치볼 것 없는 외국은 도리어 로맨스의 요람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할리우드 중견배우인 밥 해리스(빌 머레이)와 이제 막 결혼한 샬롯(스칼렛 요한슨)도 비슷한 처지다.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에 온 밥은 죄다 자기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작은 일본일들의 호들갑과 거두절미식 엉터리 통역에 어안이 벙벙하다. 아내와의 국제전화도 겉돌기만 한다. 사진기자 남편을 따라 도쿄로 온 샬롯은 말로만 사랑한다는 남편이 일 핑계로 사라지고 나면 할 일이 없다. 현란한 도심이든 고적한 관광지든 이들에게 일본은 피로와 소외, 권태와 고독을 자아내는 배경일 뿐. 그러나 같은 호텔에 묵게 된 이 두 이방인은 같이 조금씩 일본의 면면을 접해가면서, 아내도 남편도 채워주지 못한 공허감을 동병상련의 정으로 어루만지게 된다. 작별의 마지막 순간까지.

원제를 발랄하게 통역한 듯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그러나 오해를 낳는 제목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통역되지 않는 곳에선 ‘사랑도 통역이 안 되나요?’라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를 패러디하고 보니 <비포 선라이즈> 같은 여행지 배경의 로맨틱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로맨틱하고 코믹하긴 해도 이 영화는 로맨틱할 때 코믹하진 않다. 코믹한 건 ‘롸져 무어’를 ‘로쟈 무어’라 우기는 일본인들의 발음 따위지만, 로맨틱함은 그런 코믹함에 배어드는 단절감을 생의 위기와 더불어 성찰하고 위무하는 진지함에서 비롯한다. 한데 이 진지함마저 로맨스로 발전하진 않는다. 52살의 밥과 25살의 샬롯은 험버트와 로리타가 아닐 뿐더러 척척 맞받아치는 스크루볼코미디의 선수들도 아니다. 노련한 대화보다 뜸들이는 침묵으로 첫잔을 교환한 그들은 영화 같은 사랑과 우정 대신 사소하지만 극히 현실적인 호기심과 체념을 맴돌 뿐이다. 그러나 오버하지 않는 작은 느낌의 떨림들이야말로 낯선 곳 낯선 이와의 만남을 촉각적으로 감응하게 하는 살아 있는 리얼리티다. 침대에서도 사람 ‘人’자마냥 기댈 뿐인 절제의 미덕은 괜히 섹스나 해대는 불륜판타지보다 훨씬 더 섬세한 울림을 전해준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데뷔작 <처녀자살소동>에 이어 확실하게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난다. 자신의 일본 체험에서 우러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일본 스케치에서도 진일보한 면이 있다. 그녀는 사무라이 정신 같은 사라진 이데올로기를 할리우드식으로 전유하는 대신 뉴욕 출신의 샬롯 같은 코스모폴리탄의 눈으로 또 다른 국제도시의 현재를 가감없이 담아낸다. 빌딩에 공룡이 걸어가는 포스트모던한 도쿄는 전적으로 일상적인 디테일을 통해 친밀함과 낯섦을 함께 선사한다. 노래방에선 팝송을 부르다가도 TV에선 일본어 더빙 영화만 봐야 하듯, 동양의 메트로폴리스는 더없이 서구적이면서도 소통 불능이다. 여기엔 더이상 동과 서의 위계 따위도 없다. L과 R을 구분 못하는 일본인을 한심해 하는 미국 배우도 일본 토크쇼에선 바보취급당하게 마련이다. 웃으며 서툰 영어를 둘러대는 통역사나 다소곳이 일본어를 고집하는 꽃꽂이 강사의 과잉친절은 불친절과 다름없다. 호텔 창문이든 차창이든 유리에 비친 이미지들처럼 미끄러져가는 일본은 매혹과 접근 불능, 익숙함과 소통 두절의 양가성으로 범벅돼 있다. 감독의 전작에서 이어진 에어의 음악과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몽환적인 노이즈는 전통과 첨단이 뒤섞인 화려하고도 막막한 이미지를 빼어난 사운드로 옮겨준다.

도쿄라는 거대도시에서 만난 밥과 살롯. 이 두 이방인은 서로에 대한 조용한 끌림을 느낀다.

기자회견장에서 불교에 대해 떠드는 미국 여배우를 슬쩍 비꼴 줄 아는 이 영화는, 일본인을 희화화하기도 하지만 분명 상투적인 오리엔탈리즘은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게 오리엔탈리즘의 진화지 소멸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할 만하다. 자신들의 언어로 대해주지 않는다고 움츠러드는 인물들은 애당초 일본에 관심도 적응할 필요도 없었다. 관광객도 이주민도 아닌 그들은 끝내 자신들의 동일성에 갇혀 살아도 여전히 유복한 여피들이며, 일본이라는 ‘기호의 제국’의 기호를 해독 못해도 그 제국이 알아서 대접해주는 선진국민들이다. 돌려 말해 타자로서의 세상과 부닥칠 준비가 안 된 어린애거나(샬롯) 그럴 힘을 잃은 늙다리다(밥). 그러니 로맨스도 불가능할 밖에. 이 아메리칸 엘리트들의 밋밋한 방황은 그래서 은근히 자아 도취적인 멜랑콜리에 물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낯선 섬에서 마음의 섬을 찾으려는 유랑을 통해 갑갑한 현재와 막막한 미래 사이의 공회전을 엿보고 공감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인의 관점을 사려 깊게 고려하자면, 지난해 미국 영화계의 다크호스였던 이 영화가 올해까지 수상 경력을 이어가는 현상도 이해 못할 호들갑은 아닌 셈이다.

:: 배우들

소품 이상의 성취를 가능케 한 배우들

일본까지 가서 별 모험도 사건도 없이 찍은 영화지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소품 이상의 성취를 거둔 건 절반 이상 배우들 덕분이다. 코폴라 감독이 각본을 쓸 때부터 염두에 두었다는 빌 머레이는 그의 이름이 익숙지 않았을 관객에겐 다시는 잊지 못할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코미디언 출신인 그는 <고스트 버스터즈> <밥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를 거쳐, <사랑의 블랙홀>에서 심드렁한 냉소와 심술궂은 재치를 선보인 바 있지만 최근의 <로얄 테넌바움>까지 눈에 띄는 주연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 키에 무표정을 축으로 발랄함과 우울함이 적절히 오가던 약간 아웃사이더적인 캐릭터는 그만의 위트로 착실히 다져져왔다. 그 내공이 좀더 진지하게 폭발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선 예의 졸린 눈과 살짝 올라간 입가의 미소로 피곤함과 젠틀함이 뒤섞인 중년의 깊이감을 선보인다. 위스키 광고판의 중후함과 광고 촬영시의 코믹함이 무리없이 공존하는 그의 연기는, 드라마에 집중할 때도 코미디를 끌어낼 때도 섬세하게 절제된 액션으로 더 많은 심리의 여백을 열어둔다.

빌 머레이가 중년의 고비에서 정점을 쳤다면 스칼렛 요한슨은 약관 스물에 고지에 올랐다. <호스 위스퍼러>와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그 소녀 역시 코폴라 감독이 일찌감치 점찍어둔 기대주였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관능과 순수를 오가던 로리타로 분한 그녀는 이번엔 실제 나이보다 더 성숙한 캐릭터로 또 한번 중년 남자와 짝을 이뤘다. 철학과를 졸업했지만 글쓰기엔 재주가 없고 사진찍기는 힘들어하는 샬롯은, 사진도 연기도 여의치 않아 방황하던 코폴라 감독의 20대를 반영하는 인물. 스칼렛 요한슨은 감독의 주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고급 호텔에 갇힌 영락없는 백수의 권태와 불안을 과장없이 담아냈다. 오프닝에서 속보이는 분홍색 팬티를 입고 누운 그녀의 뒷모습도 그래서 요염하기보단 따분한 편. 섹시하면서도 도발적이진 않고 순진하면서도 나약하진 않은 표정들은 빌 머레이의 그것과 맞먹는 입체감을 자아낸다. 역시 2003년작인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는 화가 베르메르를 매혹시킨 소녀로 선택받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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