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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장 루슈 교통사고로 사망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시각 제시, 누벨바그 운동 촉발시킨 시네아스트

민족학자이자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에 촉발제 역할을 담당했던 시네아스트 장 루슈가 2월19일 새벽, 아프리카 중서부 니제르공화국의 수도 니아메 부근의 타후아 지역에서 자동차 사고로 86살 생을 마감했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사고 당시 그는 니제르 출신 시네아스트이자 배우자인 무스타파 알라산느와 니제르 출신 연기자이자 동료인 다무레 지카와 동행하고 있었으며, 니제르의 한 영화행사에 초청되어 이제는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되어버린 <죽음보다 강렬한 꿈>(Le Reve plus fort que la mort)의 상영회에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 이 사고에서 배우자와 동료는 부상을 입은 채 생존했지만 장 루슈는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1917년 5월31일 파리에서 태어난 장 루슈는 모나코 해양박물관장이었던 부친의 영향 때문인지 젊은 시절부터 여행과 모험에 열정을 지닌다. 토목학을 공부한 장 루슈는 프랑스 식민지 관리국의 기술자로 고용되어 1941년에 아프리카 대륙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후 그는 세네갈, 니제르, 말리, 가나 등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면서 아프리카인들의 주술·종교 의식과 일상을 필름에 담기 시작한다. 장 루슈는 부두교의 주술의식을 담은 <미친 주술사들>(Les Maitres fous)로 1957년 베니스영화제 대상을 수상했으며, 1959년 <나는 흑인이다>(Moi, un Noir)로 루이 델뤽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사회학자인 에드거 모랭과 함께 <어느 여름의 연대기>(Chronique d'un ete)를 공동으로 만드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에드거 모랭과 장 루슈는 베르토프적 전통을 이어받은 ‘시네마 베리테’라는 개념과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영화는 고다르와 트뤼포 같은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방법론적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1987년에서 1991년 동안에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이끌기도 했다.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정형화된 시선을 거부한 장 루슈는 1940년 말부터 50여년 동안 12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들은 단순히 인류학적 수단의 차원에 머물지 않으며, 영화와 삶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고민할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