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해외뉴스
[앤서니 퀸] 영면의 길 떠난 영화사 큰별
2001-06-05

3일 오전(현지시각) 세상을 떠난 앤서니 퀸은 자신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자수성가한 듬직한 남자의 이미지로 동세대를 대표해온 배우였다. 1915년생인 그의 세대에는 젊을 때 2차대전을 겪는 등 격변기에 세상과 싸우면서 스스로 인생을 성취한 이들이 많았다. 자수성가했으되 완고하거나 보수적이지 않고, 열정과 이웃사람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그의 분위기는 같은 시대를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서 친숙하게 맡을 수 있는 그런 듬직함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앤서니 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로 판초빌라의 혁명군에 가담해 싸우기도 했으나,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 뒤 얼마 안돼 교통사고로 숨졌다. 때문에 그는 미국에서 구두닦이, 신문팔이, 시멘트공, 재단사에서 권투선수까지를 전전하면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18살때 유리창닦이로 수업료를 마련해 발음교정학원에 다닌 뒤 연극무대에 올랐고, 이어 21살때 45초짜리 단역으로 첫 영화에 출연했다.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52년 <혁명군 사파타>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이어 페테리고 펠리니 감독의 <길>(54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62) 등 대작을 거쳐 그의 이미지를 세상에 가장 널리 알린 <희랍인 조르바>(64)의 주연을 맡았다. 명실공히 세계적인 스타가 됐으나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할리우드가 중요한 배역을 주지 않자, “그곳에서 내가 무슨 역을 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멕시코인이나 인디언이 아니면 마피아 보스이다”라며 이탈리아로 활동무대를 옮기기도 했다.

그는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세실 B. 데밀의 양녀 캐더린 등 세명의 부인을 포함한 다섯명의 여자로부터 9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첫 아들이 3살때 수영장에 빠져 익사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또 젊을 때 항상 노동조합의 편에 선 탓에 매카시 선풍이 미국 사회를 강타할 때는 `빨갱이'로 낙인찍혀 고초를 당해야 했다. 말년에는 회화와 조각에 몰두해 화단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한국에서도 98년 예술의 전당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다.

100여편이 넘는 출연작 가운데, 실베스터 스탤론·메들린 스토우와 함께 나온 올해 개봉 예정작 <어벤징 안젤로>가 그의 유작이 됐다.

임범 기자isman@hani.cp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