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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은 ‘귀순’하는가?

건달, <사마리아>를 보고 김기덕의 변화를 말하다

김기덕의 영화는 불편해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학취미가 있는 유능한 애인 같다. 애인이 자꾸 갈구면 이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남도 아니고 애인이 저러는 건 정말 나한테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일말의 불안은 범죄현장을 찾는 범인의 심리처럼 가학의 상황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관계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불안을 매개로 연대한다. 나와 김기덕 영화의 관계가 이렇다. 나는 김기덕의 영화가 나를 구박하는 아주 매력적인 애인 같다. 불편하지만 결코 떠나버릴 수 없는.

불편한 이유는 이렇다. 그의 영화는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지 못한 계층의 육성을 다룬다. 휴머니즘의 필터로 걸러진 얌전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핏발 선 눈으로 카메라 렌즈를 째려보는 재현의 주체로서 소외계층을 다룬다. 이들의 존재는 폭력과 더러움과 야비함의 이물감으로 화면 속으로 들이밀어진다. “너희들 이런 삶도 있는 것 알아?” 하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는, 제도적인 먹이사슬의 계보학을 통해 그런 삶의 막장까지 그들을 밀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타인들의 일상적 삶의 질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내가 담장 너머로 무심코 던진 빈 소주병에 옆집 아줌마의 머리가 깨지고 있었다니!

<사마리아>의 먹이사슬이 그렇다. 두 여고생과 원조교제를 한 어른 대부분은 아무 일 없이 제도 속에 파묻힌다. 그런데, 그중 재수없는 두명은 여진의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여진의 아버지는 자수한다. 그리고, 당사자인 재영은 자살하고, 여진은 혼자 남겨진다. 이 사건의 진정한 가해자는 그냥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피해자 서너명은 목숨을 잃거나 인생을 버려야 한다. 이럴 때 피해자들의 분노는 조준해야 할 탄착점이 없다. 그냥 제도가, 매개의 과정이 지랄 같은 거다. 이전 영화들에서 김기덕은 이런 종류의 분노를 육체를 자학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건 나쁜 제도에 대해 무력한 자신에 대한 징벌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는 제도에 대한 분노를 다른 개인에 대한 애착으로 돌려놓았다. 재영이 원조교제한 돈을 보관하고 있던 여진은 재영이 죽고 난 다음, 재영이 동침했던 남자들과 자면서 그 돈을 차례로 돌려준다. 이 의식은 재영이 자신에게 준 사랑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몸을 팔아서 번 돈을 받았기에 그 돈의 노동의 역사와 같은 행위를 통해 돈을 돌려줘야만 받은 사랑만큼 돌려줄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한 개인의 사랑에 보답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역설적 설정은 정말 지탄받아야 할 종자들이 멀쩡한 얼굴로 제도 속에 파묻혀 있는 데 대한 반어적 공격이다. 여전히 김기덕이 세상을 보는 눈은 변화가 없다.

하지만, 개인에 대한 태도는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김기덕은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맹렬한 분노 대신 눈앞에 있는 아군에 대한 사랑을 통해 조심스럽게 희망을 탐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변화가 좀더 확실하게 진전돼서 희망적인 계급적 연대로 나아갈 수 있을진 미지수이지만(그러한 연대는 적과의 싸움을 아군과의 공존의 퍼포먼스로 치를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삶을 보장해준다. 말하자면, 순교자나 전사가 되지 않고도 나쁜 제도와 지속적으로 싸울 수 있는 유희적 저항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종교적 관념에 기대지 않고도 사회적 현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김기덕의 변화가 이런 내러티브의 출발점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사마리아>를 보고 받은 첫인상은 철조망 너머에서 끊임없이 종용해온 ‘귀순 권유’에 몸이 움직인 것 같다는 거다. 웬 경찰관? 웬 자수? 그러니까 상을 준 거 아닐까? 사실 내 개인적 취향으론 <사마리아>는 무뎌졌거나 온화해진 김기덕일 뿐이었다. <섬>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그럼에도 세상 밖으로 절실히 나가야 할 때 김기덕의 영화는 가장 아름답게 날이 번득였다. <사마리아>가 더 넓은 저항과 연대의 지평으로 나가는 출구가 아니라면, 차라리 희망은 없었지만 썩은 제도의 심장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던 그 투박한 미학이 더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변화의 행방은 다음 영화에 있다. 이 때문에 그를 떠날 수 없는 거다.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