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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한번 징하고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건달,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집요한 마조히즘에 주목하다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 중학교 때 보던 ‘빨간 영어’ 1장에 나오는 아포리즘이다. 70년대 중학생 영어 참고서 시장을 제패한 기본영어는 매 장을 서양의 격언으로 시작했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등 주로 합리적이고 청교도 윤리에 충실한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운동 열심히 하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거였다. 나는 뭔가 이상했다. 이 정도 말이 왜 격언이 돼야 하지? 아는 것이 힘이라니! 초등학교 선생님이 무수히 하던 말 아닌가! 폼이 나려면 적어도 “모르는 게 약이다” 정도는 돼야 하지 않는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한참이나 한 뒤에야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이 장수하는 것은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말한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말의 힘은 ‘어떤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세상에는 말 자체와 별도로 화자의 발언권을 가늠해서 그 말의 수명을 결정해주는 보이지 않는 기막힌 다수결 장치가 있다. 들은 얘기지만,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회의를 하면 남자와 결혼한 이성애자보다는 독신이, 독신보다는 레즈비언이 발언권이 세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를 하면 간혹 ‘특공방위’가 분전하지만 결국 마이크를 장악하는 건 해병대나 특전사다. 그 어떤 과정을 거쳐 발언권이 확정되든 그 바닥에는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한 사람 순’이란 투박한 검증장치가 있다. 현실적인 발언권 쟁탈전은 이 유일한 법칙 위에서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한 적자의 자리를 경합하는 연기력 시합이다. 너무 비용을 적게 투자하면 연기임이 탄로나고 너무 많이 투자하면 마진이 적어 연기하는 의의가 없다. 이 사이에 최적점을 찾아가는 후각을 정치 감각 혹은 생활 감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 속의 발언권 획득은 대개가 정치 감각의 산물이다.

하지만, 인류사에는 다른 방식으로 발언권을 취득한 사람도 있다. 가장 많은 비용을 스스로 지불하기로 작심한 사람들이다. 발언을 위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부처는 왕자 자리를 버리고 보리수나무 아래서 도를 닦았다. 그래서 남기게 된 ‘서로 사랑하라’거나 ‘용서하라’는 심플한 몇 마디의 말. 공자가 훨씬 많은 관념을 남겼지만 인류에 끼친 영향이 그에 못한 것은 스스로 비용을 지불하는 퍼포먼스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대사는 좋은데 도대체 액션이 안 받쳐줘서 드라마가 안 되는 성우 체질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십자가형이란 가장 심란한 퍼포먼스를 보인 예수의 발언권은 2천년간 서양을 지배했다. ‘사랑하라’란 말의 저작권은 지금도 그의 몫이다. 그는 가장 마조히스틱한 권력이 가장 장수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인간은 처음 몇분만 사디스트이지 나머지 대부분은 마조히스트란 것도 일깨워주었다. 지난한 고통의 순간에만 인간의 정신은 비로소 온전한 형상을 갖추게 된다는 것도 몸소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디스틱한 육체의 세계를 통제하지는 못해도 견제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세계를 인류에게 선사했다. 그 세계를 믿건 말건 그건 신앙의 자유지만, 나는 예수가 발언권을 획득하는 과정은 신앙을 떠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전 12시간만 담았다. 영화의 중심은 예수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고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십자가를 졌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이 부각된다. 예수가 발언권을 획득한 최초의 상황에 대한 집요한 환기인 것이다. 이 투박한 접근은 예수 영화에 관한 한 가장 효율적인 담론 전략이 될 수 있다. 기독교적 담론의 발언권 획득 과정을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지점에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부에 대한 과도한 주목의 요구는 언제나 다른 정치적 의도와 결부되게 마련이다. 이 영화도 “이 사람을 보라”며 예수의 등 뒤에 숨은 선동자가 예수의 발언권을 도용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이 영화에 은근히 드리워진 반유대주의는 언제 기독교 근본주의로 치달을지 모를 태세다. 예수의 ‘피’에 대한 이 영화의 시각적, 촉각적 강조는 정말 징하지 않은가. 남재일/ 고려대 강사commat@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