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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출수록 손맛난다, NPR이 3D애니메이션의 주류가 되기까지

<토이 스토리> 이후 - 테크놀로지에 의한 테크놀로지 감추기

1995년, 우즈와 버디의 익살스러운 장난감 세계 이야기인 <토이 스토리>가 개봉되었을 때, 3D애니메이션의 ‘독립선언’이라고들 떠들어댔었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 3차원 그래픽 기술이 알려지고 나서 3D애니메이션은 주로 영화제작사나 광고대행사의 수주를 받아서 부분적인 하청작업을 하던 신세였기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는 특수효과 범주에 머물러 있던 3D애니메이션을 캐릭터 애니메이션이라는 신천지로 안내해주었다.

그뒤 5년여. 3D애니메이션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한 나머지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극장용 <파이널환타지>라는 또 하나의 획을 그을 만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개발단계에서부터 <파이널 환타지> 캐릭터 하나하나는 윈도의 바탕화면에서, 포스터나 트레일러로 3D애니메이터들을 자극시키거나 기죽이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3D가 추구하던 하나의 방향으로서의 ‘극사실주의’의 완성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리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실패 원인들이 제기되었는데, 이때 제기된 문제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이 왜 꼭 실사영화를 닮아가야 하는가”였다.

<파이널 환타지>가 3D애니메이션의 하나의 축으로서의 PR(Photo-realistic Rendering: 실사적 렌더링)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 전부터 이미 또 다른 가능성으로서의 NPR(Non Photo-realistic Rendering: 비실사적 렌더링)이 실험되고 있었다. 에서 만들어지고 1998년 의 하이-비전에서 방영됐던 <계산몽상도>는 3D가 나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것은 ‘테크놀로지에 의한 테크놀로지 감추기’였다. <계산몽상도>는 <계산행려도>라는 과거의 수묵화 작품을 3D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하여 주인공이 수묵화의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로, 최초로 발표된 3차원 디지털 수묵 애니메이션이었다.

3D애니메이션은 키프레임 작업에 의한 동화의 생성이나 스펙터클한 화면을 얻을 수 있는 장점 이면에 형태나 동작이 딱딱하고 어색하게 표현된다는 단점도 있다. 이중에서 특히 형태적인, 질감에서의 딱딱함을 극복하고 만화적이거나 또는 회화적인 처리를 통해서 3D로서의 느낌을 최대한 감추려는 것, 이것이 NPR의 출발이었다. 이후 해마다 시그래프(미국,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VR 관련 행사)에서는 NPR 작품이 빠지지 않고 선을 보였다. 론휘의 와 같이 수묵 디지털 방식 애니메이션도 있고, <탈주병>(Le Deserteur) 같은 유화 느낌의 NPR 작품도 있다. 이나 와 같이 카툰스타일의 외곽선과 만화의 형식을 활용한 경우 역시 다양하다. 굵직한 수상소식과 함께 국내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도 역시 NPR 기법에 의한 2D와 3D의 합성작품이었다.

△ OCON사의 <이니스 쿨 섬>(The Island of Inis Cool). 클레이 질감의 3D 캐릭터가 독특하다.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코믹어드벤처물이다. (위)

△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이노센스>. 감독의 전작 <공각기동대>의 속편이다. NPR 기반의 2D, 3D 합성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아래)

2004년, 드디어 NPR이 애니메이션의 주류가 되다

2002년에 개봉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3D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부분적이나마 3D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디즈니가 2D애니메이션 프로덕션을 축소하고 3D애니메이션을 주력으로 전환하는 동안에도 일본의 주류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2D가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이제 3D NPR은 주류가 되었다. 올해 개봉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화제작들을 보면 NPR 표현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공각기동대> 후속작인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는 NPR 기반의 2D, 3D 합성작으로 부분적으로 리플렉션 효과 등이 조화롭게 사용되었다. 7월 개봉예정인 오토모 가쓰히로의 <스팀보이> 역시 NPR을 기반으로 좀더 자연스러운 합성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공각기동대>의 원작자인 시로 마사무네의 대표작인 <애플시드>도 역시 NPR 기반의 3D를 만들고 있는데, 배경, 캐릭터를 모두 3D로 만들어 2차원 느낌으로 출력하는 방식을 택했다.

국내에서도 역시 NPR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성강 감독의 차기작 <천년 여우, 여우비>나 유니코리아의 <바리공주>도 NPR적 표현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독창적인 3D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장르가 시도되고 있다. 스톱모션 영역으로 확장한 3D애니메이션 작품인 OCON의<이니스 쿨 섬(The Island of Inis Cool)>은 특히 유럽 등지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은 3D 캐릭터와 미니어처 배경을 합성했으며 3D 캐릭터의 움직임은 기존 3D애니메이션의 느낌과 달라 마치 클레이애니메이션처럼 정겹다.

이제 더이상 완성된 결과물을 놓고 그것이 2D 기법에 의한 것인지, 3D 기법에 의한 것인지, 심지어 스톱모션 기법에 의한 것인지를 알아차리기가 어렵거나 의미없게 되어버렸다. <토이 스토리>에서 <파이널 환타지>까지 극사실을 추구하던 3D애니메이션은 지금, 더욱 진보된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테크놀로지를 감추고, 마치 손으로 그린 것 같고 손으로 빚은 것 같은 캐릭터와 배경을 선보인다.

최근의 3D애니메이션의 플러그인으로서의 NPR 툴들은 다양한 라인을 수용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직접 그린 외곽선의 느낌을 3D 데이터의 외곽선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외곽선을 추출하고 안쪽에 텍스처를 입힌다든지, 투명효과 등도 가능하다. 또한 목탄 같은 재질로 애니메이션을 그릴 때 프레임마다 조금씩 외곽라인이나 텍스처가 흔들리게 하는 표현도 NPR 툴 안에서 간단하게 구현할 수 있어서, 탁월한 자연주의 작가 프레데릭 벡 스타일의 애니메이션도 NPR 기법을 통해 흉내내볼 수 있게 한다. 머지않아 고흐나 쇠라 같은 인상적인 느낌이나 김홍도, 신윤복의 흥겨운 선 맛이 3D로 재현되고, 감춰진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손맛나고 살냄새나는 디지털은 점점 더 우리 감성을 움직이게 될 것이다.

NPR이 그랬듯이, 다양하게 시도되는 실험적 테크놀로지가 주류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우리가 역시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정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doha10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