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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을 회의(懷疑)함
2001-06-07

김지운 칼럼

텔레비전을 보려고 쇼파에 길게 누워 있는데 벽에 걸었던 달력이 툭하고 떨어진다. ‘저게 이유없이 왜 떨어졌지?’ ‘못을 잘못 박았나?’ ‘허어, 정말 이상한 일일세….’ 얼른 일어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살펴보면 되는데 꼼짝하기 싫은 나는 그냥 그 자세로 계속 궁리만 하였다. 궁리만 한 게 아니고 벽이며 못이며 달력에다 대고 화까지 냈다.

혀를 차며 신경을 끄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무슨 미국 방송의 한 장면이 순간, 깨우침을 얻게 하였다. 라고 하기엔 좀 거창하고 많이 반성하게 했다. 그 장면은 한 건전하게 생긴 미국의 바른생활 아저씨 하나가 창고에서 공구함을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안의 선반과 창틀을 보수하는 장면이었다. 그때 난 아, 저게 미국의 프론티어정신, 존 웨인과 게리 쿠퍼 아저씨들의 정신, 그 정신의 생활화가 바로 저것이구나 하면서 뭔지 모를 의기충천함에 벌떡 일어나 떨어진 달력을 줍고 못질했던 곳을 찾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히 벽에다 못을 대고 망치질을 했는데 그 깊이가 곰보자국보다 더 얕아서 하마터면 못질한 곳을 찾지 못할 뻔했다. 속으로 못 끝에다 접착제를 발라도 이거보단 낫겠다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나는 다시 화면 안에 꼼꼼하게 식탁과 선반을 보수하는 그 미국인의 근면성을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참고로 내 얼굴이 붉어질 때는 부끄러워서 붉어지기도 하지만 전혀 아무 일도 없는데 얼굴이 저 혼자 붉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런데 생각해보니 매번, 비숫한 장면을 볼 때마다 그런 반성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전에도 반성은 많이 했었다. 문제는 반성이 아니고 실행력이었다. 늘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다니다가 어느날 내 스스로에게 실행력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 차를 타고 가는데 한쪽 바퀴에서 덜덜덜거리며 이상한 소리가 났다. 느낌상, 한쪽 바퀴에 무언가 달라붙은 것 같았다. 평소라면 바퀴에 삽자루가 꽂혀 있어도 귀찮아서 그냥 집까지 가는 나로선 그때 문득 그 ‘반성했던 것’이 떠올라 차를 후미진 길 한쪽에 세웠다. 내려서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엄지 굵기의 나사 하나가 박혀 있는 게 보였고 나는 몇년 전부터 뒤트렁크에 고이 모셔놓고 한번도 꺼내보지 않던 공구함을 열었다.

그때가 새벽 3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주변엔 인적도 차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미국인 아저씨의 이마에 맺힌 땀을 상기하면서, 또한 반성하면서, 그 시간 그곳에서 아주 깊게 박힌 나사못을 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하다가 포기할 만도 했는데 고비 때마다 그 아저씨의 이마에 맺힌 땀을 또다시 떠올렸다. 그러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아주 깊숙이 박혀 빠질지 모르던 나사못이 쓩하고 빠져나갔다. 뿌듯했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돌아서는데, 갑자기 푸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타이어의 바람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허겁지겁 새는 곳을 막으려고 손을 갖다 됐지만 타이어는 만화처럼 ‘쭈우욱’ 하면서 오그라들었다. 인적도 없고 차량도 없었다. ‘가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새벽에 내가 한 짓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굵기의 나사못을 빼면 바람 빠지는 게 당연한 거였다. 철퍼덕 철퍼덕 소리를 내며 완전히 가라앉은 차를 조금씩 몰고가 겨우 문닫힌 자동차 정비업소 앞에 세워놓을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반성도 자주 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화된 반성이 내용없이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관성화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낄낄거리다가 그래도 너무한 거 아냐, 하면서 스스로 내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모든 반성적 행위들, 칼럼이며 일기장이며 고해성사며 자정선언이며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이며 고발이며 조롱과 풍자 등을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반성과 실행 사이에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선 내 차가 서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보았다. 내 차는 현대차인데 대우서비스센터 앞에 놓고 온 게 보였다.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