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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혹은 사랑했지만

비가 오랜만에 촉촉하게 내렸다. 비가 내리는 한강철교를 차를 타고 건너노라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는 강물의 위용 앞에 숙연해진다. 딱히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도 잠수교 교각을 들이밀며 달려드는 한강의 물결 앞에서는 어딘가 왜소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데 비라도 퍼부으면 그 혼연함에 정신마저 아득해오곤 한다.

그렇게 도도한 강물이 흘러가는 강변에서 <불새>의 세훈(이서진)은 장인에게 아내 지은(이은주)을 포기하라는 위압적인 권고를 받는다. 아니, 장인의 권고는 위압에서 그치지 않고 세훈을 모욕적으로 몰아붙였다. 외관상 유사한 개와 늑대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점은 인간에게 복종하여 따뜻한 밥과 안락한 환경을 마련하느냐, 인간을 거부하고 황량한 숲속을 헤매며 굶주리느냐라는 것이라면서. 자신만의 원칙과 자존심이 강한 세훈에게는 오직 늑대와 같이 굶주리는 일만이 남아 있는데 그런 그에게 딸을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황량하고 도도한 현실의 파고 속에 딸을 던지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을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게다가 순탄하게 삶을 영위하더라도 급물살이 호시탐탐 밀려올 가능성을 대비하여 보험들 듯이 살아도 모자랄 판에 자존의 욕구가 너무 강한 사위에게 딸의 안위를 맡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세훈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아의 원칙이 관철되지 않던 유일한 예외로 지은을 사랑하고 받아들였는데 그녀가 그 파고를 함께 넘지 못하고 세훈을 포기했을 때 그는 다시 상처받아야 했다.

그런데 지은과 한국을 떠나 10년 만에 귀국한 그에게는 지은과 버금가는 집안배경을 가진 미란(정혜영)과 전 장인과 유사한 경영능력이 겸비되어 있었다. 세훈에게 상처를 주었던 바로 그것들, 조건 좋은 남자와 집안이 원하는 상대가 되어 돌아온 그에게 지은은 가진 것은 없었지만 진실했었던 과거의 그의 모습을 회상하고 실망한다. 지은에게 그것은 이혼의 아픔 위에 더해지는 상실감일 것이다. 서로가 가까이 가고 싶을 때마다 또 한 발자국이 멀어지며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은 지은과 세훈에게는 아마 사랑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을 타인이 투영되는 자존의 욕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드라마에서 설정된 다른 관계들 역시 그것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세훈에게 미란은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거부된 타자로서의 대용이고 지은에게 정민(에릭)은 자신에게 이미 수용되어 있다고 믿었던 세훈의 이미지가 박탈된 것에 대한 대안이다. 세훈은 지은이 흔적을 내린 곳을 쓰다듬는다. 미란에 대한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변명해보지만 미란이 그를 소유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 흔적을 없애주지 못한다. 같은 이유에서 정민이 아무리 지은에게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지은이 더듬고 있는 세훈의 자리일 뿐이다. 서로에게 타인은 투영되어 있을 뿐 자아의 그늘 아래 숨을 죽인다. 이것이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회하는 그 모든 사건들을 둘러싸고 그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그 한 발자국을 바로 물러서는 한 발자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두 사람이야말로 서로에게 넘어야 할 역경이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사랑한다고 믿었을 뿐 쌍방에 대한 소통을 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들은 자아의 강한 아집을 들이밀었다. 지은이 옥탑방 신혼살림의 낯섦과 불편함을 끝내 이기지 못한 것과 세훈이 왜 부렸는지 이해되지 않는 그 원칙에 대한 고집이란 바로 꽈리를 틀고 앉은 그들 사이의 아집의 뒤틀림이다. 그 뒤틀림을 만들어가고 보여주는 프로그램의 기술에 대해서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들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할 무엇으로 설정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강물은 그 위에 새로운 인자를 지닌 빗물을 받아들여도 흔적없이 의연하다. 인간은 영원히 타자를 흔적없이 수용할 수는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흔적이 상처가 되고 복수가 되고 질투가 되는 순환고리를 끊임없이 돌지 않으려면 도도한 강물로부터 한번은 배워야 되지 않겠는가? 강물은 한번 지난 길을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잠수교 부근에 내린 빗물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자존의 상흔만을 맴돌겠는가? 지난해 가을, 낙엽이 지던 그 자리에 새순이 돋고 빗물을 받아 신록의 잎사귀들이 노래하듯이 살아 있는 것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바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자기화하는 능력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세훈과 지은이 어떻게 자신의 영상만을 상대에게 덮어씌우지 않고 타인을 자신과 공존하게 하고 융화시켜 나아갈 수 있을지 주의깊게 지켜보려고 한다.

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