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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추억을 만든 장인
2001-06-07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21 서윤성(1931∼1985)

얼마 전 아끼는 충무로 후배들과 술에 잔뜩 취한 채 노래방을 찾았다가 뜻밖의 감동을 맛봤다.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불콰해진 얼굴로 서로의 어깨를 아프게 겯고는 <맨발의 청춘>을 목이 터져라 불러제끼는 것이 아닌가? 나보다 10년 이상 연하인 녀석들이니 정작 이 영화가 개봉됐을 당시에는 세상에 태어날 꿈도 못 꾸고 있었을 것을 상기해보면 유행가의 위력이란 것이 새삼 대단스럽게 느껴진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삼키며 밤거리에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맨발의 청춘>의 가사는 청춘의 영원한 자화상이다. 영화하는 녀석들 중에 유독 이 노래를 십팔번으로 부르는 친구가 많다는 사실은 곧 춥고 배고픈 충무로생활의 반영인 것 같아 가슴이 짠하다.

한국영화사상 <맨발의 청춘>만큼 영광과 오욕이 한몸에 집중된 영화를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개봉 당시 엄청난 흥행기록을 세웠고, 저 유명한 주제가와 더불어 트위스트를 유행시켰으며, 어느 시기에 꼽든 매번 ‘한국영화 베스트10’에 들곤 했던 작품이 <맨발의 청춘>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급전직하하게 된 것은 몇해 전에 방영된 TV다큐멘터리 프로의 ‘표절시비’ 때문이다. 당시 그 프로는 신바이신(scene-by-scene)으로도 모자라 컷바이컷(cut-by-cut)까지 들이대며 <맨발의 청춘>이 일본영화의 표절이었음을 만천하에 증명했다. 1960∼70년대 충무로 시나리오의 상당부분이 당시 일본영화의 대본을 그대로 베껴낸 것이라는 세간의 속설을 반박의 여지없이 확정지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설사 위에 언급한 세간의 속설이 상당부분 진실일지라도,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맨발의 청춘>을 ‘부끄러운 작품’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보다 포괄적이고 시대적인 고찰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맨발의 청춘>의 작가 서윤성은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 중고교까지 그곳에서 마친 그는 신의주교원대학에 재학중 한국전쟁을 만나 월남한다. 휴전 이후에는 한때 <연합신문> 문화부에 근무하며 영화평론을 발표하다 신필름 기획실로 옮긴 다음 데뷔작으로 내놓은 시나리오가 <모정>인데,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아이를 처음에는 미워하다가 차츰 모정에 빠져들게 된다는 내용의 따뜻한 소품이다. 서윤성은 이후 55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60편에 육박하는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중 15편이 <맨발의 청춘>으로 당대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던 김기덕 감독과 함께한 작품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만든 <떠날 때는 말 없이>나 <카츄샤>는 현재 필름 원판은 찾을 길이 없으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노래방 십팔번으로 아직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서윤성 최고의 해는 1967년이었다. 무려 10편을 극장에 올렸다는 양적인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최고의 수확을 올린 해였다. 이만희와 함께한 <냉과 열> 및 <싸리골의 신화>는 빼어난 전쟁물로 꼽히고, 이용민의 <일본천황과 폭탄의사> 및 강대진의 <가고파>는 민족주의적 주제를 강렬한 드라마 속에 녹여낸 수작으로 꼽힌다. 같은 해 발표된 <대괴수 용가리>는 한국 SF영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역작이다. 일본의 특수효과팀을 초빙하여 제작한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 괴수물의 원조인 일본영화 <고질라>를 훌쩍 뛰어넘어 ‘청출어람’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전세계에 수출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모방이야말로 창작의 모태임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좋은 예이다.

코미디분야의 대표작은 <억울하면 출세하라>. 남진과 남정임을 비롯하여 구봉서·김희갑·서영춘·양훈 등 당대의 코미디언들이 총출연한 이 유쾌한 작품은 제목으로 쓰인 “억울하면 출세하라”를 전국적인 유행어로 만들었다. 서윤성에게 각종 각본상을 몰아주었던 것은 설태호 감독과 함께 만든 반공전쟁물들인데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시작된 이 계보는 이후 <원산공작>과 <캐논청진공작>으로 이어진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8년 양주남의 <모정>

63년 유현목의 <푸른 꿈은 빛나리>

64년 김기덕의 <맨발의 청춘> ★

김기덕의 <떠날 때는 말 없이>

65년 임권택의 <빗속에 지다>

66년 김기덕의 <불타는 청춘>

67년 김기덕의 <대괴수 용가리> ★

이만희의 <싸리골의 신화>

69년 심우섭의 <억울하면 출세하라>

70년 설태호의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71년 김기덕의 <카츄샤>

73년 박노식의 <집행유예>

76년 설태호의 <원산공작> ★

77년 정인엽의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

83년 하휘룡의 <꽃잎이어라 낙엽이어라>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