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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에로영화를 보러갔다, 한국 ‘에로틱 ’영화 상영회
이영진 2004-05-18

옛날 에로영화를 보러갔다

60~80년대 한국 ‘에로틱’영화 13편을 통해본 사회사

“배꼽 이하의 겹침은 불허한다!”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베드신은 상반신 연기에 불과했다. 웃통이라고 하지만 남녀배우들의 얼굴을 번갈아 클로즈업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검열의 가위는 번듯한 하체가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흥분해서 잘라내기 바빴고, 가슴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그걸 아는 감독과 제작자들도 거기에 길들여져갔다. 오직 땀으로 범벅된 손바닥과 꼼지락대는 발가락만이 자유로운 연기를 허락받았던 시절이었다. 5월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 동안 서울 서초동 소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되는 13편의 에로영화들에는 그러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깊고 깊은 그곳에-한국영화 속의 에로티시즘’이란 행사명에 이끌려 영화를 봤다간 “저게 무슨 에로영화냐”고 코웃음을 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봉 당시에는 소재와 표현을 두고 적잖은 파장과 논쟁이 일었던 영화들이다. 무엇보다 이들 영화에는 급변했던 사회의 잔물결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어떤가. 옛날 에로영화들에서 그 시절의 공기를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편집자

‘깊고 깊은 그곳에’ : 한국영화 속의 에로티시즘

□ 일시: 5월18일(화)∼22일(토)(5일간)

□ 장소: 한국영상자료원 시사실 ‘봄’

□ 안내: 02-521-3147 내선 1번 및 자료원 홈페이지(www.koreafilm.or.kr)

□ 시사료: 2천원(경로우대증 지참시 1천원) □ 시간표: 바로가기

<산불> 감독 김수용 출연 주증녀, 도금봉, 신영균 개봉 1967년 4월22일

“너만 재미보기냐!” “흙냄새 몽쿨한 죽림(竹林)의 욕정”

포성이 그치지 않는 1950년대 지리산 자락의 한 마을. 빨래터에선 “똥개 팔자만도 못하다”는 과부들의 푸념이 끊이질 않는다. 남자라곤 피골이 상접한 노인네 한명이 전부이니 그럴 수밖에. 그런 과부촌에 전직 교사였던 공비 규복(신영균)이 숨어들어온다. 규복은 대밭으로 그를 안내해준 점례(주증녀)와 눈이 맞아 정을 통하지만, 얼마 안 돼 이 사실을 알고 국군에게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사월이(도금봉)에게도 몸을 내줘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차범석의 동명 희곡이 원작으로 “무지와 가난이 빚은 우리 민족의 처절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묘파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토속적인 전라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배우들의 열연 또한 박수를 얻었다. 수천평의 대밭이 불타는 엔딩은 강렬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 제작자인 김태수는 이 4분 동안의 촬영을 위해 거금 150만원(이 영화의 제작비는 1100만원)을 들여 전남 담양의 죽림을 사들였고, 호사가들로부터 ‘산불이 아니라 돈불이구먼’이라는 말을 들었다. 주증녀의 허벅지가 잠깐 나오는 것을 빼곤 노출장면은 거의 없지만 실제 현장은 뜨거웠던 듯. 도금봉은 개봉 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영균이 “테스트 촬영 때는 점잖다가 레디 고가 내려지면 퍽 열심히 그리고 억세게 주물렀다”면서 “무슨 사내가 돈 벌어가며 여자를 주무르고 시치미를 떼노?”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내시> 감독 신상옥 출연 윤정희, 신성일, 남궁원 개봉 1968년 12월11일

“밀폐된 근세왕궁, 그 원색의 카-텐을 걷어보자”

패션과 영화의 공통점은 유행에 민감하다는 것 아닐까. ‘무장공비 침투가 잇따르고 반공소년 이승복의 외침이 울려퍼졌던’ 1968년. 명동은 1년 만에 여성 복장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미니스커트 물결이었고, “에로티시즘과 쌔디즘, 마조히즘을 전면에 내세운” 궁중 사극 <내시>는 충무로에 ‘섹스영화’ 제작 붐을 일으켰다. “역사적 교훈을 남겨줬던” 기존의 사극들과 달리 <내시>는 “요구가 거세된 도착적인 인물”을 보여주면서 “성과 잔인한 행위, 그 자체를 구경거리의 요소로 만들어” 주목받았다. 1970년대 초반 한 잡지에 실린 ‘스크린을 통해 본 한국영화의 섹스’라는 글에 따르면, <내시>는 “섹스를 실감있게 묘사한” 최초의 영화이며, “남녀가 궁중에서 정사를 벌이는 장면에서 숨결을 대중에게 전함으로써 관중의 호기심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일까. <내시>는 예상을 깨고 해를 넘겨 35만여명의 관객을 동원, 1969년 흥행 톱을 차지한다. 성애 표현이라고 해봤자 정작 흥분의 순간에는 “바다의 물결이 해안선을 때리거나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뻔한 비유로 대치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 시절. <내시>는 동성애를 암시하는 설정까지 끌고 들어오는 대담함도 선보인다. 왕에게 간택된 궁녀 자옥 역을 맡은 윤정희는 데뷔한 지 고작 2년밖에 안 됐지만, 이미 출연작이 100여편에 이를 정도로 톱스타. 자옥의 아버지에게 매맞고 ‘남성’을 잃었지만 연인이었던 자옥을 따라 궁에 들어가는 내시 역의 신성일 또한 당대의 ‘섹스 심벌’이었으며, 명종 역의 남궁원 또한 “가슴에 난 육감적인 털”을 무기로 대중에게 어필했다.

<벽속의 여자> 감독 박종호 출연 문희, 남궁원, 남진 개봉 1969년 5월28일

“육과 영혼의 갈림길을 방황하는 젊은 여인의 애정심리” “네개의 벽, 그것은 여인의 진정한 행복을 감싸는 베일인가. 몸부림치며 흐느껴 울어도 벅차기만 한 육체의 대화”

1969년 7월15일. 지구촌은 달나라 여행으로 들썩였다.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하루 앞두고 어른들은 TV 손질에 바빴고, 아이들도 달나라에 토끼가 정말 사는지 두눈으로 확인한다며 법석이었다. 그러나 충무로는 축제 분위기에서 예외였다. 서울지검 음란성범죄 특별단속반이 4편의 영화에 음란죄를 적용했기 때문. <벽속의 여자>도 그중 하나였다. 죄목은 음화제조. “주인공 성민(남진)과 미지(문희)의 5분 동안의 애무가 지나치다”며 감독이 입건, 불구속 기소됐다. 물론 이 장면을 그때나 지금이나 볼 수 없다. 그때 검찰이 문제삼았던 것도 이미 검열에서 잘려나가 문화공보부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조각 필름들이었다(성교를 암시하는 휴지마저 잘릴 정도였으니 온전할 리 없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성불구가 된 약혼남 성민을 돌보던 미지가 우연히 중년의 허 선생(남궁원)을 알게 되고 성에 눈뜨게 된다는 줄거리. “여인의 성적 욕망이 강렬한 색감과 오브제를 통해 표현됐다”고 하지만 뭉텅이로 잘려나간 장면이 많아 삼각관계의 긴장은 떨어진다. 119만5천여명의 관객을 동원, 개봉됐던 해 한국영화 흥행 3위에 랭크됐다.

<성숙> 감독 정소영 출연 양정화, 장용기, 서유석 개봉 1974년 10월18일

“아직 풋과일처럼 익지도 않았는데…” “쇼킹한 애정추파” “지성(知性)팬 일색, 초만원”

“너, 아직 슈베르트니?” 7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흔히 통용됐던 말이다. 슈베르트가 만들었던 교향곡 <미완성>에서 착안, 그 시절 대학생들은 숫처녀, 숫총각을 그렇게 불렀다. 서슬 퍼런 긴급조치에 숨죽이는 것은 면죄됐다 하더라도 여관 구경 못해본 젊은이들은 ‘덜 여문 인간’ 취급을 받았다. 서울 소재 K대 앞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스트리커들이 등장, 급기야 경찰서에 ‘나체질주자 수사본부’가 차려진 것도 1974년. 개봉 당시 <성숙>이 “20대 청춘들이 꼭 봐야 할 성교육 지침서”라는 평판을 얻어들었던 데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영향을 끼친 듯하다. “무분별한 외래의 후리 섹스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한국적 모랄을 제시했다”는 <성숙>의 결론은 ‘사랑없는 섹스는 상처만 남긴다’는 것. 미혼모가 된 여대생 지숙은 “도대체 순결이란 뭔가”라고 자문하고 탄식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로 유명한 정소영 감독 작품. <흑녀>(1974)로 데뷔, 이 영화에서 청순한 마스크를 선보였던 양정화는 이듬해 여자 연예인들을 돈으로 유혹해 한강변의 고급 맨션에서 ‘낯뜨거운 장면’을 연출했던 모 재벌 총수의 아들 박동명 리스트에 연루되면서 짧은 연기 생활을 마감했다.

<겨울여자> 감독 김호선 출연 장미희, 신성일, 김추련 개봉 1977년 9월27일

“장장 2000m의 장사진 앞에 누가 뭐라 말할 건가.”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비원 앞 물만두 집까지 늘어선 기다란 행렬. 당시 <겨울여자>의 포스터에 쓰여진 문구는 1970년대 들어 정부의 감시와 통제정책으로, 또 브라운관에 밀려 관객을 뺏기고 수모를 당해왔던 충무로의 자존심 회복 선언처럼 보인다. 원작이었던 조해일의 동명소설이 일간지에 연재되며 화제를 모았고 단행본으로 출판돼서도 10만부나 팔릴 정도로 인기여서 흥행은 예상했지만 결과는 기대를 넘어섰다. ‘여대생의 성적 방황’이라는 소재를 다룬 <겨울여자>는 4개월 넘게 상영되며 58만5700명이라는 관객을 동원. 한 남자가 비관자살한 것을 계기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남자들에게 헌신하겠다고 결심한 뒤 “세 사나이를 전전하는” 이화 역의 장미희는 이듬해 <속 별들의 고향>에 출연 또다시 ‘흥행 퀸’에 올랐다. 당시 한국영화 속 여성은 하이틴영화에서의 ‘순수한 소녀’ 아니면 호스티스영화에서의 ‘성적 개방성을 지닌 여자’였는데 장미희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보여줘서 대중을 사로잡았다는 것이 후일의 분석.

<죽음보다 깊은 잠> 감독 김호선 출연 정윤희, 신광일, 김희라 개봉 1979년 12월7일

“이해 겨울 잿빛 추억에 몸부림치던 그녀 다희가 방황하는 도시에서 당신의 품을 찾았습니다”

한발의 총성으로 폭정의 제왕이 몰락했던 1979년. 한국영화를 이끌었던 여배우 세대 교체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문희-남정임-윤정희 트로이카가 저물고, 대신 장미희-정윤희-유지인 트로이카가 대신했다. 새로운 미녀삼총사 모두 호스티스영화를 발판으로 스타덤에 올랐다는 것이 공통점. 정윤희 또한 <욕망>(1975)으로 데뷔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1977년 박호태 감독의 <나는 77번 아가씨>에서 남편에게 버림받고 서울에 올라와 호스티스 생활을 하는 윤고나 역으로 관심을 끌었다. <겨울여자> 이후 2년 만에 김호선 감독이 만든 <죽음보다 깊은 잠>은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해 2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던 작품. 정윤희는 의처증이 심한 아버지의 폭행이 싫어 집을 나와 가난한 음악도 영훈(이영욱)과 동거하는 여대생 다희로 나온다. 우연히 만난 재벌 2세 경민(신광일)의 부를 좇아 순정을 버리지만, 다희는 결국 마네킹 같은 삶을 살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맛본다. “1천만원 상당의 차를 벼랑에서 불사르는 등” 멜로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제작비로 1억원을 들였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감독 정진우 출연 정윤희, 황해, 최윤석 개봉 1981년 10월24일

“사랑 앞에 무엇을 감추랴. 대자연도 침묵을 지킨 강렬한 사랑 표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를 내놓은 다음 <여명의 눈동자>를 촬영 중이던 정진우 감독은 어느 날 갑자기 안기부에 끌려간다. 정부 고위층이 원하는 여배우를 기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 서대문형무소에서 한달 동안 붙잡혀 있던 그는 <여명의 눈동자>의 제작을 중단하겠다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났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는 그때 감옥에서 구상한 이야기로 원제는 <내일은 침묵>이다. 남매 사이지만 연인 사이기도 한 수련(정윤희)과 문(최윤석). 아버지가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 때문에 남매로만 지내야 하는 두 사람은 감시의 눈을 피해 자신들만의 ‘낙원’에서 서로를 탐닉한다. 강촌 구곡폭포, 오대산 월정사 연못, 영월 고수동굴 등에서 번갈아 찍은 남녀의 애정 행각은 1970년대의 그것과 여실히 다르다. 심지어 수중에서도 사랑을 나눈다. 이 장면은 감독이 직접 만든 카메라로 찍은 것. 이 장면 촬영시 15번의 NG 끝에 손현채 촬영감독은 익사할 뻔했다고 전해지며, 정윤희 또한 8m 수심 아래로 밀어넣는 무지막지한 감독의 욕심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출연 안소영, 임동진, 하재영 개봉 1982년 2월6일

“지금 애마부인이 몸 전체로 숨가쁘게 달려온다”

교복 자율화 발표가 나오자 까까머리 소년들과 갈래머리 소녀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이미 거리에선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중이었다. “여성들의 옷이나 화장이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대담하고 화려해진” 것. 의상은 핑크 아니면 보라색이었고, 그 위에는 요란한 모양의 장신구가 어김없이 얹혀졌다.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야 했던 여인들이거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미지의 성에 눈떠가는 여인들이 전부였던 이전 영화와 달리 <애마부인>의 여인은 스스로 원하는 성을 찾고자 말에 올라타는 독특한 캐릭터. 에로틱한 장면에 너그러웠던 전두환 정권 덕도 있지만, 그에 앞서 패션은 물론이고 “맞바람도 불사하겠다”는 여성들의 변화된 의식이 아니었다면 그만한 반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31만여명을 동원, 그해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이 된 <애마부인>은 개봉 당시 수도권에서까지 밀려든 인파로 “극장 유리창이 깨지는” 소동을 빚기도. 이 영화에서 큰 가슴은 물론이고 하반신의 곡선까지 대담하게 드러낸 안소영은 1982년에만 7편의 영화에 출연, 한해 수입이 5천만원에 이르는 고소득자가 됐다.

<안개마을> 감독 임권택 출연 정윤희, 안성기 개봉 1983년 2월12일

“안개 속에 감추어진 무서운 인간 본능. 간밤에도 갈대숲엔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개봉 당시 기성 평론가와 젊은 영화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처음부터 음란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노출시킨다. 남녀의 육체가 얽히는 장면이 간단없이 삽입되고 여교사가 하숙하는 방 옆에서는 성행위의 신음소리가 지나치리만큼 크게 울려퍼진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는 주제성의 탐구보다도 요즘 한국 영화계의 유행인 까닭없이 노출된 에로티시즘에 좀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성싶다”는 비난이 나왔다. 그러자 “이 영화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문제의 중심은 ‘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의 배설적 기능이 폐쇄된 친족 부락을 ‘깨철’이라는 사내와 술집의 ‘춘심’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것을 여선생의 시점을 통해 관찰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여진다”는 옹호가 맞섰다. 이문열의 소설 <익명의 섬>이 원작. 극중에서 벌어지는 군상의 성행위나 사건보다 도시와 농촌이라는 서로 다른 윤리가 작동하는 공간의 대립구도가 더 에로틱하게 느껴진다. 촬영은 2주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뤄졌다지만, <만다라>(1981), <오염된 자식들>(1982)에 이어 정일성 촬영감독, 안성기 등의 스탭, 배우가 가세한 영화라 “팀워크가 느껴진다”.

<무릎과 무릎 사이> 감독 이장호 출연 이보희, 안성기 개봉 1984년 9월30일

“와-정말…대담한 텃치! 프랑스 낭뜨도 경탄할 이장호의 LOVE REPORT”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아 대한민국>에 이어 <건곤감리 청홍백> <아름다운 우리영화> 등의 건전가요가 방방곡곡에 울려퍼지던 때. 오락실과 만화방만은 그나마 전국적인 소음에서 안전했다. 대신 그곳에 가면 다리를 X자 모양으로 꼬아 허벅지를 드러내고는 항상 정면을 응시하던 포스터 속 여자가 있었으니, 그 여인이 바로 이보희. <일송정 푸른 솔은>(1983)으로 데뷔한 뒤 쭉 이장호 감독과 짝을 이뤘던 이보희는 <과부춤> <바보선언> 등에도 연이어 출연했지만 이름을 알리진 못했다. 이 감독이 흥행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첫 번째 영화 <무릎과 무릎 사이>는 평론가들로부터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1984년 <고래사냥>에 이어 흥행 2위에 오르면서 이보희는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유년 시절 외국인 가정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 음대생 자영 역으로 나오는 이보희는 성충동을 죄악시하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비정상적인 성충동에 이끌리는 인물을 연기한다. 감독은 에로물이라는 외피 안에 미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가는 사회 분위기를 담으려 했지만 메시지가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반복적이라 별 감흥은 없다.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감독 박용준 출연 오수비, 김동현 개봉 1985년 6월28일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를 들으면서 당신은 눈뜰 것이다. 오수비의 하이볼륨 엑센트!”

2대 애마부인 오수비를 앞세웠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끈적한 여름 선을 보였지만 1만7천여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엇비슷한 제목과 내용의 성애영화들이 쏟아지면서 부부간의 성 트러블을 다룬 에로영화는 더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뒷짐지고 구경하던 정권이 ‘음란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매를 들고 나선 것도 작용했다. 연초 일본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헤이본 판치>가 한국 특집호를 내면서 오수비, 유지인, 안소영 등 10여명의 한국 여배우들을 모델로 반나 포즈의 사진을 게재해 물의를 일으키자 공연윤리위원회는 곧장 영화, 연극, 비디오 등에 대해 사전심의를 강화한다고 발표했고, 4월 들어 정부는 지나치게 선정적인 극장들의 간판을 철거했다. 이 와중에 <마타하리>의 개봉을 앞두고 실비아 크리스텔이 방한, 수입이 보류되고 있던 “<엠마뉴엘>이 포르노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성적 충동이 아니라 예술을 위해 연출자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답해 이목을 끌었다.

<> 감독 이두용 출연 이미숙, 이대근 개봉 1986년 2월8일

“뽕 따러 가세. 뽕 따러 가세. 인간사 허무한데 ‘뽕’ 따러 가세”

<어우동>이 불러일으킨 고전 에로영화 바람은 <>으로 계속됐다. 가슴에 술을 따라 왕을 굴복시켰던(이 장면이 외설적이라는 지적이 나와 결국 심의 뒤 공륜 위원장이 교체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조선시대 기생 어우동(이보희)에 이어 아낙네 안협(이미숙)은 고의적삼 안으로 비치는 까무잡잡한 살결로 일제치하 용담골을 술렁이게 만든다. 13만7천여명의 관객을 모으며 1986년 한국영화 흥행 6위에 오른 <>은 평론가들로부터 “에로티시즘이 짙은 작품이란 것은 인정되지만 여타의 아류작품들보다 드라마의 재미나 표현기법의 매력 등에서 성공한 것이지 섹스상표만을 갖고서 관객을 흡인하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면죄부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주는 제6회 영평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땟물 묻은 차림에 뽕잎을 한짐 지고서 엉덩이를 흔들며 동네를 휘젓는 이미숙과 다른 남정네에게는 몸을 내주면서도 자신에게만은 쌀쌀맞게 굴자 안달하는 머슴 이대근의 모습이 인상적.

<매춘> 감독 유진선 출연 나영희, 마흥식, 김문희 개봉 1988년9월24일

“추석이 되도 고향엘 못가고 치마폭에 쌓이는 것은 돈 대신 눈물 뿐이다! 어둠의 딸들아. 너희가 바로 천사 가브리엘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할리우드 직배사인 UIP의 국내 상륙이 시작됐던 시기, 한국영화는 저질 시비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했다. 한해 동안 쏟아져 나온 에로물만 30여편. <합궁> <떡> <맷돌> <씨내리> <빠걸> 등 “영화제목부터 낯뜨거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며 심의를 완화한 공륜에 직격탄이 쏟아졌다. 에로물이 이처럼 급증한데는 “사회민주화에 따른 검열 완화”도 있지만, 제작비가 저렴하고 지방 흥행 및 비디오 시장의 수익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최대 이변은 올림픽과 추석이 겹친 시즌에 개봉한 <매춘>의 흥행. 연극무대에 올려졌을 때부터 외설시비가 일었던 <매춘>은 지상 최대의 쇼 올림픽을 제치고 서울에서 43만여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부잣집 딸에게 애인을 빼앗긴 뒤 건달에게 성폭행 당하고 결국 몸을 파는 처지에 이른 콜걸 나영(나영희)이 추석에 고향에 못가고 그렇다고 올림픽 경기를 구경할 수도 없는 이들의 동정을 사는데 성공한 것. 헌데 <매춘>의 흥행을 ‘야하다’는 소문에 따른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혹시 “열쇠 3개 건네주고 사 자(字) 남편 얻는 건 매춘 아니냐”는 영화 속 항변이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참조 <동아연감> <한국영화연감> <영화잡지> <국제영화> <여성영화인사전> <옛날 신문을 읽었다><한국영화 70년 대표작 200><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