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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로맨스가 진화한다, 야오이 만화 [2]

사회적 개입 No! 감정적 갈등 Yes!

하드한 야오이에 비해 소프트한 야오이라고 불리는 로맨스물들에서도 재현된 주체와 여성관객 사이에 마찬가지의 관계가 설정된다. 낭만적 연애 판타지에 대한 욕구와 그 안에서의 여성 주체의 위치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꺼림칙함을 미소년들의 연애 판타지로 대체하는 것이다.

팬픽의 경우는 남성 커플링의 동기는 연애 판타지의 충족이라기보다는 스타에 대한 배타적 독점욕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내가 독점할 수 없다면 누구도 그 스타와 연애관계로 연결되지 않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독점욕과 동성끼리의 로맨스라면 로맨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강한 이성애의 발현에 의해 역설적으로 팬픽의 동성애 커플링이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같은 팀 내에서의 커플링에 집착하는 경향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항상 같이 생활하는 팀 멤버들과 팬들 외에는 인간관계를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별 팬픽의 구체적인 텍스트 내에서의 인물들과 수용자가 가지는 관계는 여타의 야오이물들과 다르지 않다. 팬픽이라고 해서 선호하는 커플링 가운데 한명을 자신이 감정이입하는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야오이물의 유행은 퀴어 커뮤니티와 관련을 가지기보다는 소녀들에게 있어 할리퀸 로맨스와 여학교에 한두명은 꼭 존재하던 소년 같은 소녀, 리본의 기사와 오스칼에 대한 동경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하겠다. 야오이에 묘사되는 동성애 관계가 사실적이지 않고 관계 속에 사회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은 종종 야오이가 비판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은 야오이가 이성애자 여성들이 연애와 관련된 욕구와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방편이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 내용의 타당성과 별도로 야오이에 대한 논의를 소모적으로 이끌곤 한다.

야오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인물간의 관계 맺기와 그 안에서 야기되는 감정적 갈등이다. 보통의 야오이물과 다르게 진지한 야오이로 평가받고 있는 마리모 라가와의 <뉴욕 뉴욕>이 야오이 팬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것은 <뉴욕 뉴욕>이라는 작품 자체보다는 야오이물을 보는 외부의 이해부족과 적대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동성애 커플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들이 부각되는 작품은 야오이 팬들 스스로 야오이가 아니라 퀴어물로 분류한다. 동성애 커플의 사회적 인정은 야오이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관계 내부의 쾌락을 추구하는 야오이물에서 동성애가 놓여 있는 사회적 관계가 개입되면 이 커플의 ‘평범하지 못함’이 의식되어 쾌락에 몰입하는 것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여성 연애 판타지

소녀문화 내의 아마추어 만화 동인이나 팬픽, 야오이에 대한 열광은 대개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한국과 대만에서도 곧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어떤 특수한 아시아성이 작용한 결과일까? 같은 아시아라도 중국은 야오이 열풍에서 아직까지는 예외적이다. 중국의 특수성은 무엇일까?

강한 동성사회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동아시아의 국가들에서 이성에 대한 인식과 기대는 실제 관계 맺기를 통해 구축되기보다는 성별 분업적으로 이상화된 역할 부여와 낭만적 연애에 대한 판타지로 관념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연애’ 외에 남성과 여성의 자연스러운 관계 맺기를 학습한 적이 없는 동성사회에서는 무수한 연애 판타지물과 실제 관계 맺기에 있어 미숙함이 동시에 양산된다.

일본이 20세기 초 서구의 근대 성개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성을 접하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던 상황은 자유연애에 대한 동경을 여학교에서 보이시한 소녀들에 대한 연모로 표현하게 했고 <리본의 기사>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은 남장여성들이 등장하는 만화들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일본을 경유한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였던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시간이 흘러 학교나 직장에서 남녀가 접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 동성사회를 해체시키기보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이성 관계를 연애 관계로 강하게 환원시키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야오이물의 유행은 실제 이성애 관계에서 욕구 충족의 경험적 실패와 좌절로 연애 판타지에 순수하게 동일시할 수 없는 여성들이 순수한 연애 판타지와 그로부터의 쾌락을 얻는 수단이다.

근대 성개념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아시아 여타 국가들과 달랐던 중국의 경우에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는 오히려 개방적이고 활발하지만 야오이는 유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체-대상, 자리 바꾸기의 한계

야오이물의 유행이 퀴어 커뮤니티의 확장과 동성애 인권의 신장이라는 측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이성애적 연애 관계에서 겪는 불만과 이성애적 관계에서 낭만적인 연애 판타지의 포기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소녀들이 즐기는 로맨스가 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소녀들이 야오물을 창작/향유하는 과정에서 이미지와 거리를 두면서 이미지를 조작하고 생산하고 독해하여 스스로 능동적 응시자가 되어 쾌락을 얻는 방식은 관계 맺기에 있어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결과적으로 남성은 지골로가 되어 보이는 대상의 위치로 갈 뿐 주체-대상 이분법 구도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응시 이론가들은 영화의 쾌락구조 안에서 여성의 응시의 공간을 찾기보다는 영화의 구조를 해체시키기를 제안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성애, 동성애, 주체-대상의 자리 바꾸기를 떠나 일대일 연애 관계의 환상과 그로부터 얻는 쾌락 자체를 폐기할 것을 의미한다. 소녀들의 로맨스 읽기의 진화 과정의 방향은 어디일까? 최근 공수 구분이 여러 버전으로 다양화되다가 그마저도 희미해지고,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신분상승이 덧붙여지는 결혼에 골인하는 이성애 로맨스의 기승전결 구조는 아니더라도 사랑을 약속하는 기승전결 구조는 있었던 일반적 구조에서 탈피해 운명적 사랑이냐, 아니냐보다는 순간의 감정적 교류를 중시하는 야오이물들이 등장해 인기를 얻는 추세에 기대를 해본다.

황미요조/ 문화평론가

야오이 만화 5선

야오이·보이 러브(BL) 작품! 이것만 읽어도 완전정복!!

1. <그라비테이션>(전 11권 완) 무라카미 마키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 야오이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 야오이계에서 이례적으로 작가가 탁월한 개그센스를 발휘, 일부 남성팬까지 확보했다. 가수 지망생과 잘 나가는 연애소설 작가의 좌충우돌 러브스토리.

2. <러브모드>(전 11권 완) 시미즈 유키 지음/ 현대지능개발사 펴냄

: 장기 연재가 이루어지기 힘든 야오이계에서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 호스트 클럽을 둘러싼 이야기로 야오이 입문자의 거부반응이 우려되나 잔잔하고 귀여운 순애적 코드 때문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이 작품 때문에 야오이를 좋아하게 됐다고 하는 사람도 꽤 많은 편.

3. <낙원까지 조금만 더>(2권 발매 중) 이마 이치코 지음/ 시공사 펴냄

<백귀야행>의 작가 이마 이치코의 BL작으로 작가의 개그센스가 십분 발휘된 작품.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볼 만하며 이어지는 사건 사고 또한 유쾌하다. 같은 작가의 다른 단편, <어른들의 문제> <키다리 아저씨의 행방> 등도 모두 BL 강력 추천작.

4. <어쩔 수 없잖아!>(전 7권 완) 고이데 미에코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원작자는 그 유명한 <후지미 2번가 교향악단>의 작가인 아키즈키 고 선생.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에 고이데 미에코의 예쁜 그림이 잘 어우러져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은 작품. 정숙한 모범생과 잘 나가는(?) 불량학생이 펼치는 학원물.

5. <절애, 브론즈 시리즈> 미나미 오자키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야오이의 고전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으로 국내에는 이미 해적판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과장된 인체대비와 극단적인 스토리(피, 자해, 자살시도 등)로 많은 이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이 작품은 야오이 골수팬들의 입문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승기연/ 만화편집기자